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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대 교수 국제정치학과      



국제 정치 분야는 ‘강대국 정치’라는 특징을 갖는다. 19세기 근대 국제 정치를 이해하는 효과적인 접근법은 섬나라 영국이 유럽대륙 국가들을 상대로 전개한 세력 균형 정책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20세기 후반부 50년 동안의 국제 정치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소련 관계를 분석해 보면 된다. 지금의 국제 질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미·중 관계를 보는 것이다. 100% 동의할 수는 없어도 이러한 세상을 우리는 G2라고 일컫는다.


그래픽=최종윤그래픽=최종윤

코로나19로 미·중 갈등 최악 치달으며 한국에 선택 강요
미·중 사이 어느 한쪽만 선택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
명분 없는 국익 내세우면 끊임없는 비난·공격의 빌미될뿐
민주주의·인권·평화·번영의 가치지향적 외교 원칙 절실


   코로나가 많은 것들을 바꾸고 있다. 국제 정치 영역에서는 강대국 이기심을 자극하고 있고, 문명사적 공감대와 투명성을 가진 나라끼리의 연대감이 더욱 강조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별적 관계’가 더욱 공고화될 전망이다. 

하지만 필자는 코로나 사태 그 자체만으로 세상의 큰 변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이후 그 위기가 대체로 해소된 것처럼 보였던 2016년을 전후로 세계는 큰 도전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소위 국제자유주의 질서 위기를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트럼피즘(Trumpism, 트럼프의 극단적 주장에 대중이 열광하는 현상),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중국·일본의 강대국 이기주의, 극단적 세계화의 후퇴 등과 같은 현상이 이미 출현했고, 코로나는 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논쟁 속에 흡수될 가능성이 크다.

미·중,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해

문제의 핵심은 코로나가 결정적으로 미·중 간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파고 있다는 사실이다. 4월 말 미국 비영리재단 퓨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반중 감정은 66%에 달해, 이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모두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여서, 어떤 전략적 원칙 혹은 입장을 취해야 할지 그야말로 첩첩산중을 마주한 느낌이다.

어느 나라도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 나라와 척을 지고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미·중으로부터 매우 구체적 옵션을 제시받으면서 노골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을 전 세계에서 유일한 동맹 파트너로 둔 한국의 입장에서 한·미 동맹은 생존적 의미를 가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미국 정부가 새로운 경제협력체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 구상을 내놓으면서 코로나 이후의 ‘생각과 마인드’를 공유한 국가끼리의 협력을 벌써부터 강조하고 나섰다.

중국은 머지않아 실현될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한·중 관계의 업그레이드를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어떤 수준에서 요구할 것인지, 우리 정부의 응답은 어느 수준일지 전망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외교적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할 상황이 벌어질 것은 자명하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은 9월로 연기된 올해 G7(선진 7개국) 회의에 한국을 초대할 의사를 내비쳤다. 공식 요청으로 이어지기에는 몇 번의 고비가 있겠지만, 코로나가 핵심 화두가 될 이번 G7 회의에서 미국은 코로나19의 책임 문제를 제기해 중국을 옥죄는 글로벌 연대를 시도할 것이다. 

미국은 한국을 그 중심축에 끌어들이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과 함께 G11 참여국으로 거론된 인도와 호주가 국제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의미를 고려할 때 미국의 의도는 더욱 선명해진다.

한국의 지리적 위치, 경제자원 현황, 산업구조, 문화적 배경, 북한 문제 등을 고려할 때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건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딱 부러지는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현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정답은 외교 영역에서 원칙을 수립하는 일이다. 민주주의·인권·평화·번영·정의·기후변화 같은 가치 지향적 원칙을 먼저 수립하는 일이 절실하다. 이익을 규정하고 만들어 나가는 작업은 그다음에 진행하는 것이 순서이다.

확고한 명분은 한국 입지 강화해

명분을 쫓아서 국가이익을 포기하자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명분 없는 이익은 끊임없이 비난과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지만, 이익 없는 명분을 각오하겠다는 자세는 장기적으로 한국의 입지를 강화해 줄 것이다. 


2016년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가 아무리 정답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지혜롭게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중국에 혐한 감정과 경제 보복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또 한국 정부가 미국의 인도 태평양전략이 지역 평화와 번영에 부합한다고 판단한다면 입장을 천명하고 참여하면 될 일이지, 실체 없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건 미국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만 받게 된다.

미·중 사이 ‘거리의 균형’을 유지하던 시간은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다. ‘가치의 중심’과 ‘이익의 균형’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다. 

북한 문제가 항상 큰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한국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싱가포르나 호주 같은 나라의 지혜도 적극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앙일보 20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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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6-02 15: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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