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5월엔 완도 여행/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묘당도 이충무공유적
  • 기사등록 2020-05-05 23:51:30
  • 기사수정 2020-05-06 00:18:48
기사수정


완도 고금도에는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지가 있다. 묘당도는 완도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충무공 신위를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충무사(국가사적 114호)와 월송대 등 유적지가 있다. 충무사에는 전라남도 문화재 163호로 지정된 작은 수첩 형식의 우수영 전진도첩 필사본이 전한다. 전진도첩은 해전 진법으로 이충무공이 직접 만들고 실전에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 31)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도(현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이곳에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에는 명의 원병으로 진린 장군이 5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해 관왕묘를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으며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 침략을 막아냈던 유적이다.

 

특히, 이곳은 해수로의 요새지로서 이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옮긴 뒤부터는 장흥, 고흥 등에 출몰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순천방면으로 도주해 버림으로 전투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은 이때 우선 본영을 건설하고 피난민들을 거두는 일 등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1598년 9월 15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순천 수교(왜교)에 침몰한 왜적을 소탕하고, 다시 10월 9일에는 고금도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가 11월 9일에는 함대가 노량을 향하여 출진하여 충무공이 11월 19일(양력으로는 12월 16일) 아침, 54 세를 일기로 순국하여 시신이 충남 아산으로 운구 되기까지 88일간 안치됐던 곳이다. 그 이듬해 1599년(선조 32년) 2월 11일 정식으로 발인, 고향인 충남 아산의 묘역으로 옮겼다. 

 

당시 충무공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의 고금도와 ‘노량해전’에서의 이야기는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1598년 2월 명(明)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이 절강(浙江)의 수군 5백여 척을 이끌고 와서 당진(唐津)에 정박했다가 이어 전라도로 내려갔다. 당시 선조는 동작동 한강나루에 나가 전송하였다.

그해 8월 통제사 이순신이 완도의 고금도(古今島)에서 적병을 크게 격파했다. 이순신이 진린과 더불어 연회에 있었는데, 적이 습격했다는 보고를 듣고는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대기하게 하였다. 얼마 후 많은 적선(賊船)이 다가오자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적중으로 돌격해 화포(火砲)를 쏘아 50여 척을 불살랐다. 적이 이에 도망갔다.

 

왜군들이 순천에 머무르며 왜교성을 쌓고 물러가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은 진린과 힘을 모아 대응했다.

1598년 겨울이었다. 이순신이 진린과 함께 왜적의 귀로(歸路)를 요격했다. 당시 진린이 갑자기 적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매우 급박하게 됐다. 이순신이 서둘러 그를 구원하였다. 전투는 치열했다. 그 무렵 이순신이 갑자기 적의 탄환에 맞았다. 황급히 이순신을 부축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순신은 의연했다. 오히려 차분하게 조카 이완을 불러 전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나를 대신해 전투에 임하라” 

이순신은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완은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뱃머리에 서서 북채를 잡고 깃발을 휘둘렀다. 군중에서는 이순신이 죽은 줄 아무도 몰랐다. 전투에 더욱 치열해졌고, 진린도 이 덕분에 포위망을 벗어나게 됐다. 

왜적이 패하여 달아난 뒤에야 진린이 이순신의 타계 소식을 전해들었다. 진린은 이완의 손을 붙잡고 통곡했다. 진린은 “통제사는 비록 죽었지만 그가 나를 살렸다”라며 오열했다.

 월송대 터에서는 지금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이 곳에 풀이 자라지 않는 것은 장군의 기가 서려 있기 때문이란다. 실제 주변과 달리 가로, 세로 1m 남짓의 안치 장소는 다른 색이다.

이순신의 시신을 묻은 월송대 터에서는 지금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이 곳에 풀이 자라지 않는 것은 장군의 기가 서려 있기 때문이란다. 실제 주변과 달리 가로, 세로 1m 남짓의 안치 장소는 다른 곳과는 다른색 땅이다. 월송대는 충무사 건너편에 있는 바다와 인접한 작은 동산이다. 이순신 장군은 살아생전에 밤이면 이곳 월송대를 찾아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명나라 제독 진린이 장군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이곳에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관왕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충무사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고금도에 역사공간 관광자원화 사업이 시작된다. 고금면 덕동리 일원에 190억원을 투입, 올해부터 2023년까지 4년여에 걸쳐 ‘고금 역사공간 관광자원 활성화 사업’을 추진한다. 

이 사업은 역사관광, 어촌체험 자원화사업, 역사공원길 조성, 인프라 시설 구축 등 4가지 나눠 진행된다. 삼도수군 통제영을 재건하고 봉수대 등을 복원한다. 방문객에게 체험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갯벌생태체험관도 조성한다. 역사공간길, 어울림광장, 해안길 광장, 정보센터, 숙박시설, 주차장 등도 만든다.


 

벌써 기대감이 늘고 있다. 완도에서 강진으로 이어지는 국도 77호선에는 두 개의 섬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연륙·연도교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면서 ‘섬 아닌 섬’이 된 신지도와 고금도가 하나가 된 것이다. 


연륙교는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를 말하고, 연도교는 ‘섬과 섬을 잇는 다리’라는 뜻이다.


지난 2007년 강진 마량에서 고금도를 잇는 고금대교가 완공됐고, 앞서 2005년에는 완도에서 신지도를 잇는 신지대교가 개통했다. 2017년에는 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 ‘장보고대교’가 들어서면서 바다로 끊어졌던 77번 국도는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신지도와 고금도를 잇는 ‘장보고대교’

이에 앞서 지난 1999년에는 고금에서 약산간 약산대교가 완공되면서 830번 지방도로도 하나로 이어졌다. 강진만을 감싼 완도와 신지, 고금, 약산 등 4개의 섬이 하나로 묶인 셈이다.

지금까지 섬이라는 지역적 한계로 뛰어난 관광자원으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신지도와 고금도도 연륙·연도교가 잇따라 개통되면서 새로운 해양 관광지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다리가 완공되기 전, 완도에서 강진을 가기 위해 해남으로 돌아 2시간여를 가야 했던 이동시간도 30분이면 충분하다.


 신지도 명사십리해수욕장

여기에 강진을 주 생활권으로 했던 고금·약산 주민들이 이어진 다리를 통해 완도로 몰리면서 침체됐던 완도 5일장이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또 긍정적인 것은 완도의 다른 멋진 관광지를 찾는 관광객들도 함께 늘어나고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 직전까지 그랬다. 이 사태가 잠잠해지고 있는 오늘, 완도의 멋진 관광이 더 기대되고 있다.  


주도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0-05-05 23:51:30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유니세프
 많이 본 뉴스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