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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스승이자 탕평책과 실사구시를 주창한 문신이자 학자인 양득중의 영정(1665∼1742).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영당

조선의 정치에 실학의 시작은 ‘덕촌 양득중(1665~1742)’으로부터이고, 양득중이 주장한 ‘실사구시(實事求是)’ 때문에 추진된다. 양득중이 영조에게 ‘실사구시’ 4글자를 정치에 반영토록 건의했다. ‘실사구시’는 정치에 반영되고, 이후 영조 정치는 실학을 그 근간으로 한다. 


영조는 즉위 후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다. 실학의 역사에 양덕중의 결정적인 공은 또 있다. <반계수록>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실사구시’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29년(영조 5년) 2월 6일이다. 양득중이 영조의 부름을 받게 되자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를 떠받들고 유학을 보위한다[扶世道衛斯文]’는 주장은 참으로 허위이자 가식(假飾)이라고 주장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4자를 모토로 정치를 혁신할 것을 주장한다. 


양득중이 그해 2월에 정3품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승진해 춘추관의 정3품직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고 있을 때 주장한 발언이었다. 정3품에 제수되고 이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주강에 참여한 뒤 첫 번째 발언이었다. 


영조는 덕촌을 매우 맘에 들어 했다. 영조는 낮에 경연(經筵)을 열어 관료들과 함께 경서(經書)의 내용이나 정사(政事)의 득실에 관해 토론했었는데, 양득중으로부터 여러 차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양득중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임금인 영조에게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實學)을 역설하였다. 또 수취체제(收取體制)의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학문풍토의 개선을 건의하였다. 탕평책(蕩平策)으로 고질적인 당파싸움을 없애자고 하였다.

 

영조는 대답했다. 

-“경서를 강독하며 논평한 유신(儒臣)의 말은 이 시대(時代)의 이론(理論)을 크게 놀랍게 했지만, 나는 유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

 

양득중이 말했다. 

-“근래에는 사실(事實)이 아닌 것을 사실(事實)처럼 꾸미는 것이 시대의 유행이 되고 있습니다. 『후한서(後漢書)』 「하간헌왕덕전(河間獻王德傳)」에 나오는 “학문을 닦아 옛것을 좋아하며,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구한다[修學好古 實事求是]”는 말이 있는 데 실사구시(實事求是)는 그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참으로 사리(事理)에 맞는 교훈(敎訓)이 될 만한 말입니다.”

 

임금 영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승지에게 명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네 글자를 써서 들이라”

 

‘실사구시’ 이 넉 자를 써서 자신의 편전의 벽에 걸어두도록 했다. 영조 방 오른쪽(좌우, 座右)에  ‘실사구시’ 4글자를 붙여 표상으로 삼는다. 


이는 양득중의 실사구시가 영조와 정조 대의 새로운 정치를 태동시킨 결정적인 장면이다. 그 뒤 조선 정치는 완전 달라진다. 실학과 양명학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되고, 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을 세상에 알리고,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비롯한 나경적(1690- 1762), 신경준(1712-1782), 서명응(1716-1787), 위백규(1727-1798), 황윤석(1729-1791), 홍대용(1731-1783), 서호수(1736-1799), 박제가(1750- 1805), 하백원(1781-1844), 김정호(1804-1864) 등 실학자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줘 우리나라 과학사의 한 획을 그은 거장들이 대거 출현케 한다.


덕촌의 진단에 의하면 주자-성리학이 언필칭 ‘의리’, ‘사문(斯文)’ 등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무리를 이루어 명리(名利)를 쫓고 권세에 영합하고 있다고 봤다. 심지어 ‘의리로써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영조가 임금이 된 뒤 임기 초기에 만난 양득중은 영조의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양득중이 영조 5년에 주장한 ‘실사구시’는 영조 정치에 늘 따라다녔다.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 1694~1776)는 누구인가.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2년간 왕위를 지켰던 그는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 양득중의 실사구시이 힘이 적잖았을 것이다. 그 자신 콤플렉스와 개인사적 불행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세제시절과 영조 재임 초기인 5년에 양득중을 만나 ‘실사구시’를 펴고자 했고, 이를 통해 ‘탕평책’을 실천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 ‘실사구시’를 알기 전과 그 이후 영조의 정치는 분명 달랐다. 이 이전의 정치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18세기 초 조선의 중앙 정치 무대는 지난 세기 동안 누적된 붕당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해 있었다.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은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진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진검승부가 되었고, 각 붕당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숙종년간 남인과 서인의 대결구도는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한 이후, 서인 내부에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들 소론과 노론의 대립은 숙종의 뒤를 이을 다음 왕과 관련하여 또다시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런 정치 소용돌이에서 탕평책과 실사구시를 정치에 근간으로 삼아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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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21 17: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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