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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은 19세기 대화가인 소치 허련의 정통 남종화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한국화가이다. 호남화단만 아니라 한국화단에서 남종문인화의 맥을 잇는 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가 허백련

 

허백련은 19세기 대화가인 소치 허련의 정통 남종화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한국화가이다. 호남화단만 아니라 한국화단에서 남종문인화의 맥을 잇는 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지막 남종문인화가’, ‘남종문인화의 대가’, ‘남도 화단의 큰 산맥’으로 통한다. 광주를 ‘예향’이라 부르는 것도 그의 명성에 따른 바라 할 수 있다.

허백련은 꿋꿋하게 조선풍의 남종문인화를 그렸다. 그는 ‘의재산인(毅齋散人)’과 ‘의도인(毅道人)’이라는 호를 사용하며 단아하고 깊이 있는 운필을 통하여 남종문인화의 정신세계를 가장 진솔하게 담아내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느 장소를 그렸다고 한 적은 없으나, 낮은 산이 이어지고 계곡물이 흐르는 전라도 산천을 주로 그렸다.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할 당시 심사위원인 가와이(川合玉堂)는 심사평에서 “순수한 조선 산수라는 점에서 호감이 갔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남종문인화가 중국 문인화풍을 근간으로 한다지만 추사와 소치, 그리고 미산을 거쳐 이어지면서 조선화 했을 뿐 아니라 이를 토대로 그린 의재의 화풍 또한 조선화풍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미술교육과 연진회

 

허백련은 1938년에 시·서·화가들의 모임인 ‘연진회(鍊眞會)’를 발족하여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이는 그가 주도한 광주에서의 첫 사업이었으며 전통서화의 진작과 후진양성을 목표로 삼아 회관 마련 등의 다양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초창기 연진회는 정회원 4명, 통상회원 10명 등 14명으로 출발했다. 회원 중에는 서화 애호 인사를 비롯하여 지방 유지 및 고급 관리, 일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당 이범재와 동강 정운면을 비롯하여 근원 구철우, 서운 임신, 의재의 아우인 목재 허행면 등의 서화가와, 의사로서 해방 후 내무부장관을 지낸 민병기, 관리였던 이원보, 군수인 춘파 김동곤과 소당 오석유, 독립투사였던 지아 양지환, 거부였던 원당 최정숙, 일본인 마쓰자와쇼이치로(增澤壯一郞)와 아카노슌지(朱野俊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허백련과 가까웠던 서울의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와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이 찬조회원이 되어 연진회를 격려하기도 했다. 허백련과 이들과의 친분은 이후 연진회 화가들이 중앙에서 활동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연진회는 1950년대, 광주 호남동 완벽당 화랑에서 재결성 된 후 1960~7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 무렵 국전에서 다수의 수상자를 내어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허백련은 그의 인생에서 연진회 발족을 아주 보람되고 자랑할 만한 일로 생각했다. 연진회원들의 열정적인 분위기가 광주에 글과 그림을 아끼는 풍조를 뿌리내리게 했다는 자부심일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한 폭 그림을 아끼는 마음이 들게 한 데는 허백련과 연진회원들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삼애학원과 농촌 부흥운동

 

허백련은 무등산에 정착하여 고요하게 살면서 그림만 그렸던 화가는 아니다. 후진을 양성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는 화가로서 그림 그리는 제자를 길러냈고, 해방 후에는 광주국민고등학교를 시작으로 1953년에 인가를 받은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세워 244명의 졸업생을 배출해낸 교육자였다. 교육을 통해서 나라 발전과 사회 변혁을 이끌어 내려 했던 사회운동가였던 것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허백련은 무등산에 먼저 들어와 있던 최흥종을 만난다. 그리고 36년의 일제강점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부흥시키려면 농업이 발전되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우리나라가 부유한 나라가 되려면, 일꾼을 많이 길러내야 한다며 농업학교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모델은 농업으로 입국한 덴마크였다. 

허백련과 최흥종은 당시 대창석유 사장이었던 고광표와 홍석은을 이사로 이끌어 학교설립을 추진했다. 1947년 ‘삼애학원’을 설립하였고, ‘삼애정신(三愛情神)’을 바탕으로 농촌 부흥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삼애(三愛)란 애천(愛天), 애토(愛土), 애족(愛族)으로 최흥종은 이것을 하나님 사랑, 땅 사랑, 민족사랑으로 정의해 삼애학원의 건학 이념으로 삼았다. 건학 이념에 동조한 노산 이은상과 홍석은, 김천배 등이 초기 설립 업무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다석 유영모는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시를 지어 보냈고, 김천배는 그 가사로 교가를 만들었다.

개교 당시 교장자리를 두고 최흥종과 허백련은 서로 사양했으나 결국 오방이 교장을 맡게 되고, 의재가 부교장을 맡았다. 가난 때문에 진학을 못하는 농촌의 청소년들에게 교육기회를 부여하고 영농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허백련의 이념을 바탕으로 삼애학원은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고 30여 년간 농촌 지도자를 양성했다. 개교 당시 15명이었던 신입생은 교사들과 침식을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1977년까지 모두 24기에 걸쳐 244명을 배출했다. 

 

다인茶人 허백련 

 


허백련은 이 시대에 우뚝 선 다인(茶人)이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인이 운영하던 무등산다원(無等の里)을 인수하여 삼애다원(三愛茶園)이라 이름 짓고 경영하였다. 처음 인수받을 때에는 거의 황폐화된 상태였던 것을 말끔히 정리해 차밭의 면모를 만들었다. 차밭의 총 면적은 5만 평으로 이 중 차를 심은 면적은 3만평 정도였다.

허백련은 이 차밭에서 ‘춘설’이라는 일품차를 생산해냈다. 춘설차라는 이름은 의재가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에 실려 있는 남송 대 문인 나대경(羅大經, 1196~1242)의 산문집 「학림옥로(鶴林玉露)」 중 약탕시(?湯詩) 싯구에서 취한 것이다.

당시 허백련은 춘설헌(春雪軒)에서 기거하며 차와 함께 나날을 보냈다. 그는 직접 차밭을 일구고 차를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또한 모든 것을 수수하고 격식 없이 했지만 차를 만드는 것만큼은 최고여야 했다. 이에 차의 품질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지켰다. 

이 무렵 허백련은 농업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농업학교 학생들과 함께 다원을 관리했다. 그리고 여기서 발생한 수익금은, 학생들과 함께 가꾸고 만든 것으로부터 나왔기에 모두 농업학교 운영비로 지출되었다.

그렇다고 허백련이 차를 가르친 것은 아니다. 그의 차 습관은 오히려 격식을 중시하지 않는 ‘생활차’ 정신이었다. 불필요한 격식을 버리고 생활 속에서 즐겨 차를 마시도록 한 것이다. 그는 춘설헌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하며 청담(淸談) 나누기를 즐겼다. 허백련에게 차는 늘 자신과 함께 하는 일상생활이었다. 그는 차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또 차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그럼으로써 실수를 줄이게 되어 잘 살게 된다며 차 마실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홍익인간과 단군신전 건립

 


일제 강점기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민족주의자 허백련은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이념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주장했으며,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무등산에 단군신전 건립을 추진했다. 일제 때 훼손된 무등산 천제단을 복원하여 단군신전을 세우려 한 것이다. 허백련은 1969년 단군성전 건립을 위해 자신의 작품 39점을 내놓아 5백만 원이라는 거금도 마련했다. 그해 10월 3일 개천절에는 1만평 부지에 기공식도 올렸다. 기금확충을 위해 1974년 3월 『단군무등산신전허백련헌납도록』도 발간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홍익인간’이라는 글씨를 써 나눠주기도 했고, 무등산 단군신전 건립추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은상을 추진위원장으로 세웠다. 당시 허련 전남 도지사가 재임기간 동안 무등산 단군신전건립사업에 국가예산을 지원한 바, 사업은 범도민 차원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 민족혼을 찾아야 한다”며 “단군선조에 대한 얼을 찾기 위해 내 마지막 힘을 바치겠다”던 허백련의 꿈은, “단군을 경배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민족혼”이라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라는 기독교 측의 계속되는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그러다가 허련 지사의 퇴임과 허백련의 와병으로 이 역사는 중단되고 만다.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무등산에 단군신전을 건립할 꿈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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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20 17: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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