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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인물/ 독립운동가 석아 최원순

 

 옥고를 치른 최원순/   최원순은 1926년 필화로 옥고를 치렀다. 8월 22일자 칼럼<횡설수설>이라는 코너에서 일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최원순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징역 8개월을 구형받았다. 최원순은 이 필화사건으로 결국 3개월간 복역했다.

2.8 독립운동과 최원순

 

최원순은 1919년 일본에서 한국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주도한 민족독립운동가이다. 2·8독립선언 당시 최원순은 유학생 대표로 현덕신, 이광수, 백관수 등과 역할 나눠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춘원 이광수가 선언서 작성을 맡았고, 최원순은 자신의 책임아래 광주 유학생 10여 명을 데리고 1주일간의 철야작업을 하면서 2.8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많은 이들에게 홍보를 할 목적으로 진행된 이 일은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임무였다. 최원순이 다니던 학교 와세다대학 내에서 1만부 이상을 등사로 찍어 만반의 준비를 끝낸 후, 백관수가 이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최원순의 역할이 막중했으나, 정작 당시 2·8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에서는 최원순의 이름은 빠진다. 더 막중해질 2·8독립선언 뒤 사후처리 일을 최원순에 맡긴 것이다. 

이후 최원순의 아내가 된 현덕신도 2·8독립선언에 중요 역할을 맡았다. 동경여자의과대학에 다니던 현덕신과 여자학원에 재학 중이던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여자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에 필요한 자금을 비밀리에 모집한 것이다. 현덕신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40원을 혼자 모아, 독립자금으로 제공했다. 일제는 이런 최원순과 현덕신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기에 감시 요주의 대상으로 삼아 블랙리스트 상단에 이름을 올렸다. 

일제가 작성한 요시찰조선인 동정 명부(블랙리스트)에 최원순은 ‘을호’ 대상자로 분류됐고, 현덕신은 가장 요주의 대상인 ‘갑 1호’로 분류했다. 최원순이 ‘을호’ 대상자가 된 것은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였지만, 표면적으로 서명자에서 빠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춘원(李春園)에게 問하노라>/   최원순은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왼쪽)을 논박하는 장문의 글 <이춘원(李春園)에게 問하노라>를 6월 3일과 4일에 걸쳐 동아일보 1면에 발표했다.

최원순, <이춘원에게 問하노라>

 

1922년 이광수는 연일 조선 민중에게 훈시를 했다. 그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분열과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라고 하면서 ‘이기적이고 나태한 겁쟁이’인 조선 민중은 엘리트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집단에 봉사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은 결국 “뛰어난 집단 앞에 우리 민족은 복종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22년 이광수가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때 그 반응은 일파만파의 충격이었다. 최원순과 함께 1919년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시 최원순이 받은 충격은 컸다. 최원순으로서는 2·8독립선언이라는 역사적인 일을 함께 도모했던 이광수가, 도대체 왜 조선 민중 전체를 호도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논박하는 장문의 글 <이춘원(李春園)에게 問하노라>를 6월 3일과 4일에 걸쳐 동아일보 1면에 발표했다. 동아일보 기자가 되기 1년 전에 외부 필자 자격으로 최원순이 기고 한 것이다.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개벽 5월호 소재(所載))를 읽고’, ‘민족성 개조(民族性 改造)의 윤리적 근거(倫理的 根據)가 무엇인가’를 묻는 글을 실었다.

 동경유학생 순회 강연단/   최원순은 동경유학생 학우회 강연단으로 1920년부터 1922년까지 3년 동안 모두 3차례 여름 방학마다 귀국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 강연을 펼쳤다. 흥학관에서 열린 최원순의 강연(맨 아래 사진)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만원을 이뤘다. 당시 시국강연을 하다가 경찰의 해산명령으로 중지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사진 맨 위는 1920년 1차 순회강연, 가운데 사진은 1921년 제2차 순회강연 때 찍은 기념사진이다.
 총독정치(總督政治)는 악당(惡黨)보호정치(保護政治)/   최원순은 1926년 8월 22일자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코너에서 일본 총복부를 겨눴다. 이 글에 따르면 “총독정치에 대한 비평(批評)이야말로, 정말 기발(奇發)하다. 현재의 총독정치는 조선인을 이롭게(利) 하고 이익(益)되게 하는 인사는 박해하고 배척 하면서도, 조선인을 해롭게 하고 불리케 하는 놈들은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방침이라고, 그러므로, 말하기를, 총독정치(總督政治)는 악당(惡黨)보호정치(保護政治)라고”

언론인 최원순, 필화사건

 

최원순은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과를 졸업하고, 1923년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으며 후에 정치부장, 편집국장대리를 역임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인 조직인 무명회와 철필구락부에 참여해 전 조선기자대회의 개최를 주도하기도 했다.

최원순은 1926년 필화로 옥고를 치렀다. 8월 22일자 칼럼<횡설수설>이라는 코너에서 일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이 글에서 “총독정치(總督政治)에 대(對)한 비평(批評)이야말로, 정말 기발(奇發)하다. 현재의 총독정치는 조선인을 이롭게(利) 하고 이익(益)되게 하는 인사는 박해(迫害)하고, 배척 하면서도 조선인을 해롭게(害) 하고 불리(不利)하게 하는 놈들은 절대적으로 보호(保護)하는 방침이라고, 그러므로 말하기를, 총독정치(總督政治)는 악당(惡黨)보호정치(保護政治)라고” 비판했다.

최원순은 이 글에서 조선인을 이롭게(利) 하고 이익(益)되게 하는 이를 “인사(人士;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사회 활동이 많은 사람)”로 존중한 반면, 조선인을 해롭게(害) 하고 불리(不利)하게 하는 이를 “놈(者;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표현했다. 최원순 다운 표현이었다. 

이 글로 인해 최원순은 <보안법> 위반,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은 <신문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는데, 9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최원순은 징역 8개월을 구형받았다. 결국 최원순은 이 필화사건으로 3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계유구락부 2주년 기념/  1928년 고향 광주로 돌아온 최원순은 1933년 최흥종 목사와 함께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활동을 위한 모임인 계유구락부를 결성했다. 최흥종(맨 아래 줄 왼쪽에서 두번째) 목사가 초대 회장을, 최원순(아래에서 두번째 줄, 왼쪽에서 세번째)이 초대 간사를 맡았다.

빈민구제활동과 민중계몽운동 펼쳐

 

최원순은 1928년 고향 광주로 돌아왔고, 이후 광주에서 동아일보 광주지국장을 맡아 일하면서 1933년 최흥종 목사와 함께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활동을 위한 지역 유지모임인 계유구락부를 결성했다. 최흥종 목사가 초대 회장을, 최원순은 초대 간사를 맡았다. 

계유구락부는 1927년 2월에 결성된 신간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단체다. 신간회는 좌·우익 진영이 제휴해 만든 대표적인 항일운동단체였으며 최원순이 동아일보 기자시절 조선일보의 신석우, 안재홍 등과 신간회 조직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이렇게 본다면 신간회 출신들이 계유구락부를 이끈 셈이다. 최흥종은 신간회 광주지회 회장 출신이었고, 계유구락부 2대 회장을 역임한 김용환은 신간회 광주지회 간사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계유구락부는 빈민구제활동과 민중계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934년 광주천 호안공사와 직강공사를 벌이면서 강제 철거된 금동과 양동, 학동 일대 천변 영세민에 대한 구제 사업을 펼쳤다. 또 도산 안창호와 몽양 여운형 선생을 초청해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34년 6월 26일 서서평 선교사가 타계했을 때는 최원순을 중심으로 계유구락부 회원들이 광주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생전의 서서평은 항일의식이 매우 투철한 선교사였기 때문에 그녀의 사회장은 그 자체가 일제에 대한 일종의 시위를 의미했다. 

한편, 최원순은 시대를 깨우고, 조선 민중을 깨운 대중연설가였다. 그는 2.8독립선언 이후 동경 유학생 학우회 총무로, 동경유학생 학우회 강연단으로 1920년부터 1922년까지 3년 동안 여름 방학마다 귀국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 강연(오른쪽 페이지 사진)을 펼쳤다. 

 

 무등산 석아정에서 단란했던 최원순과 현덕신/   최원순과 현덕신은 일본에서 2.8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였고, 귀국해서는 부부가 되어 언론인으로 의사로 주어진 소명을 다한 시대의 지성이었다.

마지막 초여름을 무등산에서 보낸 석아 최원순

 

최원순은 동아일보 정치부장, 편집국장 대리를 맡아 일했으나 일제의 고문과 수감생활의 영향으로 차츰 건강이 나빠졌다. 만신창이가 된 몸에는 폐결핵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최원순의 아내 현덕신은 남편의 건강을 위해 공기가 맑고 산세가 수려한 무등산 증심사 초입 야산에 집을 지었다. 최원순의 호를 따 집 이름을 ‘석아정’이라 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쁘게 달려왔던 최원순·현덕신 부부는 석아정에서 한동안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동안 현덕신은 YWCA회장직도 버리고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돌보았으나 최원순은 1936년 7월 6일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주인을 떠나보낸 석아정은 최흥종 목사에게 자리를 내줬다. 그렇게 오방정이 됐고, 그 뒤로 춘설헌으로 바뀌었다. 석아와 오방, 그리고 의재 이들 세 명의 우정이 한 공간을 통해 이어진 것이다. 

 

 광주 현덕신의원 개업 시절 현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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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17 09: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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