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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인물 / 무등산의 성자 오방 최흥종



오방 최흥종이 타계한 뒤 그의 이름으로 남겨진 물질적인 재산이나 물건은 거의 없었다. 오직 성경책 3권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난 자리에는 나환자와 폐결핵환자, 그리고 걸인과 빈민을 위한 ‘사랑’과 ‘헌신’을 남겼다. 


 

최흥종 오방五放하다

 

최흥종이 타계한 뒤 그의 이름으로 남겨진 물질적인 재산이나 물건은 거의 없었다. 오직 성경책 3권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생전에 그가 보던 한글로 쓰인 성경책 한 권과 영어로 쓰인 성경책 한 권, 그리고 러시아에 선교를 하러 갔을 때 보던 러시아어로 쓰인 성경책이 그것이다. 

최흥종은 스스로 호를 오방(五放)이라 정하고, 주위 지인들에게 자신의 사망통고서를 돌렸다. 즉 “죽은 사람으로 봐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회적 약자 곁을 늘 지켰다. 오방이란 ‘다섯 가지를 놓아버린다’는 의미로 모든 집착을 떨쳐버린다는 뜻이다. 그 놓아버린 5가지는 집안의 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을 의미했다. ‘명예욕’, ‘물질욕’, ‘성욕’, ‘식욕’, ‘종교적 독선’ 등의 “다섯 가지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두 놓아버리고 난 자리에는 나환자와 폐결핵환자, 그리고 걸인과 빈민을 위한 ‘사랑’과 ‘헌신’을 남겼다. 

 


성자의 지팡이 / 한센인과 폐결핵 환자들을 보둠은


최흥종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09년 4월에 이루어진 선교사 포사이드(W H Forsythe)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이 만남을 통해 평생 한센병 환우들을 도우며 여러 사회활동에 몸을 바치게 된 것이다.

최흥종이 목포에서 광주로 오는 포사이드를 마중 나갔을 때의 일이다. 포사이드가 추위에 떨고 있는 나병 환자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입히고 나귀에 태웠다. 이때 나병에 걸린 여인이 길바닥에 지팡이를 떨어뜨렸고 이를 본 포사이드가 곁에 있던 최흥종에게 지팡이를 주워달라고 요청했다. 최흥종은 피고름이 잔뜩 묻은 지팡이를 보며 한센병이 옮지는 않을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외국인보다 동포애가 없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서 지팡이를 집어주게 된다. 성자의 지팡이로서의 그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33년, 최흥종은 전국에서 모여든 500여 명의 나환자들과 함께 총독부 안마당까지 쳐들어갔다. 이른바 ‘구라행진(求癩行進)’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나환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7시간 동안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소록도 갱생원을 대폭 확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게 된다.

같은 해에 최원순과 함께 계유구락부를 창립하여 빈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56년에는 나주에 호혜원(互惠園)을 창설하여 음성나환자를 수용했다. 또 1958년에 무등산 원효사 아래에 폐결핵환자수용소 ‘송등원’을, 1962년에 무등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무등산 최흥종 움막 거주지/   최흥종은 움막 토담집에 살았다. 무등산에 토담집 ‘복음당’을 짓고 살면서 결핵환자들을 돕고,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예배를 드렸다.

 

최흥종이 땅 1천평을 기증해 설립한 광주나병원/  최흥종은 1909년 포사이드 선교사가 죽어가는 나환자를 위해 정성껏 치료, 간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평생동안 ‘헌신’을 실천하는 성자의 길로 들어선다. 1911년 최흥종은 광주 봉선리에 있는 자기 소유의 땅 1천평을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 나병원을 설립토록 도왔다.


3.1운동-YMCA 활동에 투신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 광주제중원 등 기독교 연합 세력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는 최흥종 등이 서울과 연대하면서 일찍이 만세운동을 조직적으로 준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흥종은 전라남도 지역에 배포할 독립선언문을 받아 광주로 가려던 중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이때 그는 대한문과 남대문 사이를 오가며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물론이고, ‘태극기를 들고 나오라’는 통지서 약 400매를 집집마다 배포한다. 또 ‘신조선신보’라는 인쇄물을 살포하기도 했다. 

그는 일 일로 체포돼 출판법 위반과 보안법 위반 혐으로 1년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20년 6월 13일 출소했다. 당시 최흥종은 “나도 조선인이므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것이오. 나는 이번에도 독립이 될 거라고 믿소, 어쨌든 나의 독립사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오.”라 말했다고 한다.

최흥종은 출소 뒤인 1920년 7월 29일 광주기독교청년회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1924년에는 회장으로서 연합회에 가입하여 광주YMCA를 활성화시켰다. 1930년에 재차 회장 일을 맡아 시무하였고, 해방 후에는 YMCA 재건총회에서 다시 회장에 추대되어, 광주YMCA를 복구하는 일에 힘썼다. 최흥종은 YMCA를 통해 어린이와 여성운동, 그리고 농업인 양성에도 적극 나선다. 1921년 4월에 광주유치원을, 그해 10월에는 여성을 위한 한글 야학에 나서고, 1933년에는 농민강습회와 농업실습학교를 세워 농업지도자 양성에도 나선다. 

우월순 선교사, 서로득 선교사, 그리고 어빈슨 선교사 등의 도움이 컸다. 

 

 광주유치원과 최흥종/  최흥종은 광주 주일학교 운동을 이끌었던 우월순 선교사와 서로득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동생 최영욱의 부인인 김필례가 주도된 자선음악회 등을 통하여 재원을 마련하여 1921년 4월 광주유치원을 개원하고, 이어 중앙교회에 중앙유치원을 개원하여 소설가 박화성 등을 교사로 세운다. 최흥종은 여성 교육에도 적극 나선다. 1921년 10월 1일부터 여성 한글 야학을 운영해 여성배움운동을 적극 지원한다. 사진은 1921년 광주유치원 첫 졸업식.



광주 최초 목회자, 작은 교회운동-평신도운동

 

최흥종은 광주 최초의 장로였고 목사였다.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사역하고 광주 무등산에서 소천한 그리스도인이자 목사인 것이다. 그는 종교지도자로서 작은교회운동-평신도운동을 주창하고, 나환자와 폐병환자의 목회자를 자처하며 실천하는 교회를 지향했다. 

최흥종은 북문안교회의 초대장로가 되었고, 1917년부터는 북문밖교회의 요람인 기도처의 전도사 일을 보았다. 그러다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면서 1921년 북문밖교회(현 중앙교회)의 창설목사로 부임했고, 이어 1924년에는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30년대 후반 한국기독교가 신사참배로 기울어져가는 시점에 최흥종은 무등산자락 증심사 계곡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최흥종은 1937년 2월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구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당시 교계 지도자를 겨냥해 비판하고, 평신도의 각성과 분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방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며, 증심사 계곡 신림마을 근처에 자리한 작은 오두막 거처를 <오방정>이라 이름 짓는다.

큰 교회 목사였던 그는 그의 처소에서 신림마을 주민들 몇 명과 예배를 드렸다. 1938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광주의 기독교인 중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이 하나 둘 신림동의 움막집에 찾아 와 함께 기도를 드린 것이다. 이를 ‘신림기도처’라 불렀다. 큰 교회 활동과 다른, 더 험난한 길이 될 가난한 자들 편에 선 작은 교회 활동의 시작이었다. 그는 폐결핵환자 수용소에 예배당을 세운 후 ‘복음당’이라고 불렀다. 이 복음당의 목회자가 바로 최흥종이었다. 

 


“우리는 어찌 살라고 아버지만 무정하게…”


최흥종이 86세가 되던 1964년 12월 30일,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서 「유언장」을 인쇄하여 가족과 친지에게 보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1966년 2월 10일부터 금식을 시작했고 94일째가 되던 1966년 5월 14일에 타계한다. 5월 18일에 치러진 장례식은 광주공원에서 시민장으로 진행됐다. 장례식장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였다. 일반 조객들은 물론 나병환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최흥종이 앞장서 설립했던 나환자 자활촌인 호혜원 가족 300여 명이 달려 나와 “아버지!”를 외치며 한없이 울었다. 

이날 호혜원 총무 최일담(나환자 자활자) 씨가 단상에 나서 조사(弔詞)를 했다. 

 

오방 최흥종을 떠나보내는 광주시민들/ 1966년 5월 14일 최흥종 목사가 타계했을 때 의재 허백련은 광주시 사회장-오방 최흥종 선생의 장례식에서 시민을 대표했고, 그는 조사를 낭독했다.


“아버지, 어찌하여 우리만 남겨두고 가신단 말입니까. 아버지께서 영원히 가버리시면 누가 우리를 돌봐줍니까. 추운 겨울 누가 옷 입혀주며, 굶주릴 때 누가 밥을 먹여 줍니까? 우리는 어찌 살라고 아버지만 무정하게 가신단 말입니까?…” 

 호혜원 아이들과 최흥종 목사

조사를 하는 사람도 울고, 조객들도 울었다. 그가 돌봤던 한센인들과 송등원 가족들은 하관이 끝난 무덤가를 해가 질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당시 국내 유일한 나환자 진료소인 광주나병원으로 온 한센인들

 

/글 양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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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17 09: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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