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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선조 22)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 장계가 올라왔다.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고변(告變)은 정여립의 일당으로 안악에 사는 조구(趙球)의 밀고를 받아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이 함경감사에게 보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고변은 정여립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해 겨울에 서울로 쳐들어와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죽이는 한편 교서를 위조해 지방관들을 죽이거나 차직시킴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켜 일을 성사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난폭하고 무도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자신의 악행을 고한 여종의 배를 갈라 죽였는가 하면, 아버지가 현감이었을 시절에는 고을 일을 제 마음대로 처결해 버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글 읽기에 매진하니, 그 이름이 전라도 지방에 널리 알려졌고 세간에서는 그를 죽도(竹島)선생이라 불렀다. 정여립은 기백이 높고 언변이 출중해 좌중을 탄복시키는 일이 많았다. 이 시기에 그는 이이 ․ 성혼의 문하를 왕래하며 학문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이 ․ 성혼은 정여립이 다소 과격하고 급한 기질이 있음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박학다식에 탄복하여 조정에 천거하기까지 했다. 1584년(선조 17)초에는 정승 노수신에 의해 김우옹 ․ 이발 등과 함께 조정에 천거되었다. 또 이발 ․ 이길 형제의 추천으로 사헌부와 홍문관에 발탁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이이가 죽었다. 그러자 정여립은 이발에게 붙어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도 바꾸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던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으로 시종 매도했다. 선조는 이런 정여립을 배은망덕한 자라고 혹평하여 시골로 쫓아내 버렸다.

 

정여립은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났던 황해도 안악에 내려가 그곳에서 교생 변숭복(邊崇福) ․ 박연령(朴延齡) ․ 지함두(池涵斗)와 승려 의연(義衍) ․ 도잠 ․ 설청 등과 사귀면서 비밀리에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당시 세간에는 “목자(木子〓李)는 망하고 전읍(奠邑〓鄭)은 흉한다”는 『정감록(鄭鑑錄)』류의 동요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는 그 구절을 옥판(玉板)에 새겨진 승려 의연으로 하여금 지리산 석굴 속에 숨겨 두도록 했다. 그리고는 뒤에 산 구경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위장해, 변숭복 ․ 반연령 등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대를 타고난 인물로 여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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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에 천안 지방에서는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자가 화적질을 하고 있었는데, 용맹이 뛰어난 관군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지함두를 시켜 황해도 지방으로 가서 “길삼봉 ․ 길삼산(吉三山)형제는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에도 들어가고 계룡산에도 들어간다”, “정팔룡(鄭八龍)이라는 신비롭고 용맹한 이가 곧 임금이 될 것인데, 머지않아 군사를 일으킨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팔룡은 여립의 어릴 때 이름이었다. 소문은 곧 황해도 지방에서 널리 퍼져 “호남․ 전주 지방에서 성인이 일어나서 만백성을 건져,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리라”라는 유언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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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09 21:4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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