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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인간』이라는 책을 쓴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놀이의 첫 번째 요소로 ‘아곤(Agon)’을 들었다. 아곤은 시합과 경기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이 아곤에는 시합에서 이기려는 경쟁적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로제 카이와는 아곤에서 테니스·축구·권투·펜싱 등 수많은 스포츠 경기가 태어났다고 보았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스포츠에서 놀이적 요소와 경쟁적 요소를 분리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놀이와 경쟁이 견고히 결합된 경계선 상에서 무수한 스포츠가 꽃을 피웠다.

하늘을 살피기 위한 수학 공부

조선시대에 수학을 왜 공부해야 했는지, 그리고 수학이 당시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논한다면 크게 하늘의 수학과 땅의 수학의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우선 하늘의 수학은 역법을 정하는 일이다. 역법은 곧 달력이며 시간을 정하는 원리를 말한다. 농본사회에서 하늘의 상태와 변화를 잘 살피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는데, 가시적인 일식이나 월식, 백성들의 궁핍을 야기하는 홍수나 가뭄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이는 임금의 부덕이나 무능 탓이었기 때문에 달력을 정하는 일은 임금이 바뀔 때마다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중국의 역법을 빌려와 사용했지만 우리와 경·위도가 다른 지역의 역법이 꼭 맞지 않았고, 축적되는 오차로 인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간격이 벌어졌다. 상용되던 역법을 수정 보완하면서 우리의 역법을 마련하기 위해 정밀한 수학적 계산력이 요구됐고, 그렇게 해서 만든 세종 때의 ‘칠정산(七政算)’은 해·달·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에 대한 계산을 기초로 수립된 천문 역법이다.

땅의 이모저모를 보살피기 위한 수학 공부

수학은 인간사의 이모저모를 보살피기 위해 필요했다. 국가의 살림을 위해 세금을 거두어들여야 했고 세금을 거두기 위해 토지 측량이 필요했으며, 측량을 위한 단위인 도량형을 정하는 일은 일반 백성의 장터에서도 요구된 것이었다. 그래서 산학 기술관을 뽑는 국가고시인 ‘산학취재(算學取材)’의 과목 중 많은 문제가 세금 정산에 필요한 계산법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산학서에서 기하 관련 내용을 거의 찾기 어려운 와중에도 토지 측량을 위해 다양한 형태를 띤 도형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전통사회에서 신체의 일부 등 편리하고 쉽게 사용했던 도량형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자 객관적인 표준화된 단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오늘날의 공식 도량형인 미터법처럼 조선시대에는 ‘황종관(黃鍾管)’이 그 역할을 했다. 국악 음계의 기본음인 황종음을 내는 길이의 관을 도구로 해 길이·들이·무게의 측량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길이로 말하자면 검은 기장 1백 알을 일렬로 늘어놓아 황종척(黃鍾尺) 1자로 삼은 것이다.

02. 원·명의 달력을 참고한 칠정산 내편』 ⓒ서울대학교 규장각 03. 산학취재를 통해 합격한 산원의 명단을 기록한 『주학입격안』 ⓒ국립중앙도서관 04. 『신편산학계몽(보물 제1654호)』 ⓒ청주고인쇄박물관

궁궐 안에서 이루어진 수학 공부

오늘날 국가적 차원에서 수학교육에 관심을 두는 것은 수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이고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이와 같이 수학에 대한 긍정적 마인드를 지닌 임금이 바로 세종이다. 세종의 훌륭한 업적들은 수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종실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세종은 바쁜 일과 속에서도 중국에서 들여온 수학책 『산학계몽』을 부제학 정인지를 스승삼아 스스로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또한 경상감사가 새로 제작해 올린 『양휘산법』 100권을 책의 내용이 도움이 될 만한 주변의 수학과 천문학 관련 관리들에게 하사하고 공부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오도록 유학생을 선발하는가 하면 수학교육을 장려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독려했음이 실록에 적혀 있다.

사대부의 수학 공부

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은 공부이다. 주로 유교 경전을 읽고 생각하고 논하는 일이다. 그들은 사회의 특권 계층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수학에 접근하기 쉬웠고 명·청을 통해 서양의 수학도 접할 수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마음만 먹으면 수학 공부를 하기에 유리한 지위에 있었지만 그들의 공부 범위에 수학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의 글에 나타나있듯이 당시의 사대부들은 대개 수학 공부를 부끄럽게 여겨서 기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이 사대부의 학문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사회적 통념에도 불구하고 수학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보여준 황윤석(1729~1791)이나 남병길(1820~1869)과 같은 사대부도 있었다.

황윤석은 백과사전적 문집 중 세 권을 인용 표시와 함께 수학 관련 내용으로 집필했고, 남병길은 수학 내용을 ‘도해’, 즉 그림을 이용해 쉽게 이해 가능하도록 설명하고 풀이했다. 수학 공부를 기피하는 지위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굳이 수학을 공부하고 수학책을 썼던 소수 사대부들의 수학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보인다.

산원들의 수학 공부

궁궐에서 임금이나 사대부의 호학에서 비롯된 수학 공부 외에 조선시대의 수학 연구를 주도한 주역은 단연 산원들이라 할 수 있다. 나랏일 중 천문이나 통역과 같이 기술관리직에 해당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중인 계급 중 수학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이다.

그들은 ‘산학취재’를 통해 선발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합격자 명단을 담고 있는 문서인 『주학입격안』을 보면 산원의 직분이 가업으로 세습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아버지가 산학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고, 또한 집안 선반에는 산학취재를 준비하기 위한 산학서가 구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일반인들보다 수학 공부에 몰두할 자질과 집안 분위기가 갖춰져 있는 셈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수학책을 통해 파악되는 대표적인 산원이 경선징(1616~?), 홍정하(1684~?), 이상혁(1810~?)이다. 이들이 집필한 수학책(경선징 『묵사집산법(?思集算法)』, 홍정하 『구일집(九一集)』, 이상혁 『산술관견(算術管見)』 등)을 높이 사는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취재를 위한 시험공부에 국한된 공부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이 취재 준비를 하는 후배들의 공부를 돕기 위해 책을 썼을 수도 있고, 공부 과정에서 산학 거장들의 오류를 발견하고선 흥에 겨워 책을 썼을 수도 있다.

집필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자신의 공부를 발전시킨 내용을 책에 담고 있다. 때론 원래의 취재 과목인 중국 산학서와 다른 해법을 고집하기도 하고, 보다 심오한 해법을 제안하기도 하고, 수학적 이론화를 추구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산원들의 수학 공부

오늘날 수나 계산과 무관한 하루를 상상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백성들도 생활 속에서 기본적인 계산을 필요로 했고, 계산 도구로서 ‘산대’를 이용했다. 오늘날의 인도-아라비아숫자 대신 막대를 늘어놓아 숫자를 표현하는 방법인데 이 늘어놓는 방법에는 임의의 약속이 아니라 규칙이 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쉽게 외우기 위해 노래로 만들어 암송한 것이다. 노래 가사가 막대를 가로로 눕히거나 세로로 세우는 방법을 담고 있어 종횡법(從橫法) 또는 산대 계산을 위해 보자기를 펴놓고 그 위에 산대를 배열해 계산한다는 의미에서 포산결(布算訣)이라 하며, 곱셈 등의 기초 계산을 위한 구구합수(오늘날의 구구단) 같은 노래도 불리곤 했다.

19세기 말 러시아 장교들이 조선을 여행하고 남긴 여행기에서는 조선 백성들이 산대를 이용해 계산하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한다. 자신들의 통역관이 수입 계산을 위해 매일 아침 아리아를 크게 부르면서 막대를 이용한 쉽고 독특한 방법을 이용했다고 전할 만큼 인상적이었던가 보다. 익숙하지 않은 수학적 패턴이지만 일상에서 늘 사용해야하는 수학적 지식을 노래로 불러 이용할 만큼 지혜로운 조상이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역할에 따라 수학 공부의 목적이나 그 필요성에 있어 차이가 났을지라도 수학을 공부해야 했다. 하늘의 일이건 땅의 일이건 나라와 백성이 합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수학이 빠질 수 없는 것은 오늘날과 다를 바 없다.

 

글 장혜원(서울교육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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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09 17: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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