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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을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가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전라도」 연작시편 ‘봄’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고 절망 속에서 사랑과 희망을 노래한 시인 이성부(李盛夫, 1942~2012)는 1942년 1월 22일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54년, 광주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학생잡지 《학원》에 여러 차례 시를 발표한다.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고교 선배인 박성룡, 윤삼하, 정현웅, 강태열 등을 만나며 문학적 분위기 속에서 습작을 계속한다. 

 

전국 규모의 고교생문예작품현상모집에 여러 차례 당선하며 시적 재능을 드러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6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바람」이 당선된다. 이어 1960년에 조병화, 황순원, 김광섭 등이 교수로 있는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해 본격적인 습작기를 갖는다. 

 

이듬해에 《현대문학》에 「소모(消耗)의 밤」이 초회 추천을 받고 이어 「백주」, 「열차」 등으로 추천을 완료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그리고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糧食)」이 당선된다.

 

1968년에 《68문학》 동인으로 참여하고 「전라도」 연작을 발표하면서 1970년대부터 활발하게 일어나는 민중시의 흐름을 계시하며 민중 지향적 서정시의 기반을 닦는다. 

 

1969년, <한국일보사> 기자로 입사한 뒤 바로 첫 시집 『이성부시집』을 <시인사>에서 펴내는데, 이것으로 제15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다. 1974년 두 번째 시집 『우리들의 양식』을 <민음사>에서 간행하고, 그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 문학인 101인 선언에 서명한다. 

 

『백제행』(1977), 『전야』(1981)를 펴내고 오랫동안 시 발표를 하지 않았다. 시집 후기에서 “시작(詩作)의 쓸모없음, 모든 언어에 대한 깊은 불신 등 최근에 갖게 된 나의 절망이 해소될 기미는 이 시집 출판을 통해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밝힌대로 시창작으로 현실문제가 해결될 수 없어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1980년 5월을 함께 하지 못한 죄의식으로 절필하게 된 시인의 초상이 절망적으로 그려진다. 시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역사적인 아픔으로 자신의 문학적 이상을 실현할 의지를 상실하였다. 이후 창작과는 거리를 두고 군부독재 시절을 침묵과 방황으로 보내며 산행을 시작하였다.

 

오랜 침묵을 깨고 출간한 시집 『빈 산 뒤에 두고』(1989)에서부터 ‘5월 광주’의 원죄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적 대상으로 산이 등장한다. 산을 향한 집념과 사랑이 시적 상상력으로 태어나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시인에게 산은 ‘정신의 지극한 높이에 닿아 있는 맑고 깨끗하고 감격스러운 세계’로 다가왔다. 산길을 걸으며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본다며 산을 향한 시적 지향을 표현하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산행을 시작하여 거의 9년이 지나면서 산에 관한 에세이와 시가 여물게 된다.「백두대간과 나의 문학」에서 시인은 오랫동안 창작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산을 통해 말문이 트이고 활기를 되찾았다고 밝힌 바 있다.

 

제6시집 『야간산행』(1996) 이후 지리산 시편 82편을 묶어 제7시집 『지리산』(2001)을 펴냈다. 『야간산행』이 삼각산, 설악산 등 산행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지리산』은 지리산의 역사와 문화, 산행을 통해 얻은 산과 시인이 하나 되는 자기성찰을 담고 있다. 시인에게 산은 자연물로서의 산일뿐만 아니라 지리산으로 상징되는 우리들의 고통받는 삶과 역사의 현장이 되어 시세계의 중심을 흐르고 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2005), 『오늘의 양식』(2006) 등을 간행하였다. 2012년 2월 28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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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06 13: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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