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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람(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생물학에서는 ‘사람’보다 ‘인류(mankind)’라는 용어를 더 흔하게 사용한다. 인류는 척추동물문(門) 포유강(綱) 영장목(目) 사람과(科)에 속하는 동물이다. 

다소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인류란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호미니데(Hominidae: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을 포함함), 즉 사람과(科)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종에 속하는 영장류를 말한다. 


이런 분류가 쉽게 와 닿지 않으면 더욱 간편한 다른 판별 방식이 있다. 부모가 모두 사람 형상을 한 동물 사이에서 태어났으면 사람이라고 분별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만 보면 ‘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이처럼 간단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에 대해 실제로 논할 때는 이런 정의에 만족하지도 않고 이런 정의에 한정해서만 이 말을 쓰지도 않는다.

 

『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서 ‘사람(인간)’의 풀이를 살펴보자. 첫 번째 풀이는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니라.”라고 할 때의 사람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 사전에는 ‘사람’의 다른 풀이로서 “일정한 자격이나 품격 등을 갖춘 이.”라고 나와 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라든가 “인재를 등용하려고 해도 사람이 없다.”라고 할 때의 ‘사람’은 바로 이런 뜻에서의 ‘사람’을 가리킨다. 

 

어떠한 사람이 앞의 생물학적 정의를 무사히 통과(합격)했더라도, 이런 ‘국어사전적’ 기준에 비추어 보면 불합격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생각하지 않거나(혹은 못 하거나), 언어를 사용하지 않거나(혹은 못 하거나), 도구를 쓰지 않거나(혹은 못 하거나), 또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거나(혹은 못 하거나) 하는 경우는 불합격 인간, 즉 사람으로서 실격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떠한 자질이나 품격 등을 갖춘 자”를 뜻하는 ‘사람’ 기준까지 동원하면 실격 인간이 합격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람 (판별) 기준’과 관련해서 한나 아렌트의 주장은 들어볼 만하다. 현대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 중 한 사람인 그는 인간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엄격히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노동(labor)’은 순전히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해 행하는 육체의 동작이다. ‘작업(work)’은 ‘노동’과 다르다. 


‘작업’은 인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하는 일에서 재미를 찾고 어떠한 명예를 바라면서 수행하는 제작 활동이다. 이런 ‘노동’이나 ‘작업’과 달리, ‘행위(action)’는 개인의 욕망과 필요를 뛰어넘어 공동체 속에서 공정성이나 공공선을 실현하고자 행동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생각해보자. 한 개인이 어떤 직장에 다니는 목적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그는 ‘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서 흥미나 성취감을 맛본다면 그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만일 직장 생활 이외에 봉사활동을 하거나, 또는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해 개선책을 건의한다든가 실제로 개선을 향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런 구분을 인간과 다른 동물을 분별하는 데 쓰지는 않았다. 아마도 ‘노동’으로 말하면, 인간 말고 동물도 하는 거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과연 동물도 ‘작업’ 비슷한 것을 하는지는 단언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행위’는 인간과 동물을 엄격히 가르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사회적 동물이라고 알려진 개미, 꿀벌이나 영장류라도 사회 정의, 도덕성, 책임감, 약자에 대한 배려 등과 같은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흔히 ‘채찍과 당근’을 말한다. 말이나 당나귀를 잘 부리려면 가장 필수적이고 훌륭한 수단이다. 이런 동물들이 빠르게 달리고 무거운 짐을 열심히 나르게 하려면 사정없이 채찍으로 후려갈기고 때때로 먹음직스러운 당근으로 달래는 게 최고다. 모르긴 해도, 천리마나 천하제일의 당나귀라고 해도 이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제재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떤 일시적 보상에 대한 기대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은 결코 인간다운 ‘행위’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말이나 당나귀와 동격인 동물의 동작일 뿐이며, 더욱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의 삶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요즘 언론에 드러나는 한국 사회와 우리 자신의 자화상은 한마디로 엽기적이다. 상상력 넘치는 작가가 기괴하게 조합해 만들어 낸 창작물을 방불케 하는 사람과 사건들이 여기저기에서 출몰(?)하고 있다. 여러 전문 분야의 꽤 높직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 중에도 한심함을 넘어 이들이 과연 인간이 맞나 하는 의문을 품게 하는 행태를 적지 않게 보인다. 이들 중 몇몇은 생물학적 기준은 몰라도 국어사전적 의미에서는 ‘인간’ 실격의 딱지를 받을 것 같다. 

 

우리 자신을 향해 “나는 진정한 사람인가?” 물어보자. 예컨대 아렌트가 말하는 ‘행위’와는 무관한 삶, 기껏해야 ‘채찍과 당근’으로 조종되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사람답게 행동하는 데 있다.”라는 평범한 명제를 깊이 생각해보자.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잘 생각하도록 힘씁시다. 이것이야말로 도덕의 기본 원리입니다.”라고 간곡한 어조로 호소했다. 참으로, 평이하면서도 거듭 새겨봐야 할 명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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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4-11 1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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