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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 49> 참으로 위험한 흑백논리
  • 기사등록 2023-03-20 16:52:37
  • 기사수정 2023-03-20 16: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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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떤 의사가 어떤 깡패의 아버지를 수술했다. 원래 성공하기가 매우 어려운 수술이었다. 의사는 수술하기 전에, 수술이 어렵다는 것과 환자가 죽을 수도 있음을 환자 아들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수술을 했으나 환자가 죽고 말았다. 깡패인 아들이 의사에게 대들었다. “당신이 내 아버지를 살렸소? 못 살렸지 않소? 그러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인 거 아니요? 당신은 살인자야!”

 

사물이나 사태를 구분할 때 쓰는 방법 중에 이분법(二分法)이 있다. 대상을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구분지(區分肢)로 명쾌하게 나누는 경우를 말한다. 만물을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는 것이나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는 것이 이런 예에 해당한다. 이 세상의 많은 것이 이런 이분법으로 무리 없이 설명될 수 있다.

 

전쟁 상황에서 이분법을 적용하는 건 어떨까? 전쟁터에서 사람은 무조건 적 아니면 아군, 이 두 가지 중 하나다. 물론, 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여야 하고 아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려야 한다. 전쟁 통에서 이분법적 사고는 꽤 쓸 만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이분법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일들 역시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데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분법으로 명쾌히 구획되지 않는 사례가 더러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많다. 

 

가령, 사람을 선악을 기준으로 해서 성자와 악마, 두 부류로만 나누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세상에는 정말 착함 그 자체나 악 덩어리 그 자체인 인간이 드물게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 사람 안에 선과 악을 함께 지니고 있다. 


지극한 선인으로 존경 받는 사람조차 부분적으로는 악한 면을 갖고 있고, 극악무도한 자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에게도 선한 구석이 있다. 요컨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굳이 통계 수치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세상 만사는 대부분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많은 세상 일이 이처럼 이분법으로 깔끔하게 설명될 수 없는데도 이분법적 접근 방식을 절대시할 때 ‘흑백 논리(의 오류)’라는 부정적 딱지를 갖다 붙인다. 흑백 논리는 모든 문제를 흑과 백, 선과 악, 득(得)과 실(失)의 양 극단으로만 구분하고 중간적인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각이다. 대단히 편협하고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순전한 검은색과 순전한 흰색의 양 극단 색깔 사이에는 회색이 폭넓게 펼쳐져 있다. 순수 선과 순수 악 사이의 양 극단 사이에는 불순 선과 불순 악(부분적 선과 부분적 악의 혼재)이 다양한 편차로 존재한다. 득실 문제를 따져보더라도 완전한 이득과 완전한 손실 어느 하나만이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요즘도 ‘애국지사냐 매국노냐?’와 같은 거친 물음이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명색의 지성인에게서조차 튀어나온다. 국가 간의 중대 문제를 다루는 외교의 성과에 대해서 국회의원이 이런 단어를 서슴없이 쓰는 경우도 꽤 있다. 

 

이런 구분법을 주저 없이 동원하는 발상에는 모든 문제가 적과 아군(동지) 또는 흑과 백, 딱 두 가지로 명쾌히 분류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다. 일종의 ‘이분법에 대한 맹신’이다. 이들은 지금 한국 사회를 전쟁터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전쟁터 같은 분위기로 몰아가고 싶은 생각이 강한 것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솔함을 넘어 폭력적 발상이고 삭막한 관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선동가들은 이분법을 무슨 사회 개혁과 발전의 비책(祕策)인 양 휘둘렀다. 선동가들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적 아니면 아군이다. 압제자 아니면 해방자이고, 착취자 아니면 착취 당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이분법적 선동이 횡횡하는 사회는 현실이 전쟁터와 같은 사회, 또는 그렇게 돼야 하는 사회다. 삭막함을 넘어 살벌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툭하면 이분법적 논리를 동원하는, 편 가르기를 충동질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지도자도 지성인도 아니다. 기껏해야 무책임한 여론과 경박한 시류에 영합하는, 권력 지향적 선동가일 뿐이다.

 

이와 함께, 모든 개인은 사고의 폭을 넓히고 관점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와 여자 두 가지로 단순명쾌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행동양식, 취향, 가치관, 믿음, 세계관 등 숱한 면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편차가 넓고 큰 존재다. 


흑백 논리를 맹신하면 인간과 세상이 충분히 다채롭고, 그래서 아름다울 수도 있음을 놓치게 된다. 인간과 세계의 다채로운 실상을 깨닫지는 못할지언정 갑갑한 흑백 논리의 틀에 갇혀 사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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