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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47> 왜 품격있게 말해야 하나
  • 기사등록 2023-02-07 11:15:06
  • 기사수정 2023-02-07 11: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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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송나라에 조상(曹商)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송나라 임금을 위한 사신으로 임명되어 진(秦)나라를 방문했다. 진나라로 가기 전에 송나라 왕에게서 수레 몇대를 받았다(당시에는 왕이 선물로 수레를 주는 게 일종의 관례였다). 그가 방문한 진나라 왕 역시 그에게 수레 100대를 선사했다.

 

송나라로 돌아온 후 장자(莊子)를 만나 자랑스레 말했다. “이렇게 비좁고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궁상스럽게 짚신이나 삼고, 비쩍 마른 몰골로 사는 이런 일에 나는 관심이 없다네. 수레 일만 대를 가진 왕에게 딱 한번 가르침을 주고 수레 100대를 받아 오는 일, 난 그런 일에 자신이 있단 말일세.”

 

이 말에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한테 수레를 선사한 그 진나라 왕 말이지. 그 양반이 병이 나서 의원을 부르면, 종기를 따서 고름을 빼내주는 의원에게는 수레 한 대를 주었다더군. 그리고 치질을 혀로 핥아서 고쳐준 의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주었다네. 치료한 곳이 더러울수록 수레를 많이 준 것이지. .... 자넨 정말로 치질을 많이 고쳐준 모양이로군. 그렇게 많은 수레를 받은 걸 보니 말이야!”

 

‘장자(莊子) 잡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일격이 아닐 수 없다. 장자의 응수를 대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이 일화만으로도 장자가 탁월한 사상가, 풍자가로 역사에 빛나는 까닭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서슬 푸른 칼날 같은 장자의 풍자를 듣고 난 조상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진다. 흔히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느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럽다’느니 하는 표현을 쓰지만, 이런 비유가 무색할 만큼 가관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장자는 칼날 못지않은 매서움과 날카로움으로 상대방을 비판하고 있지만 눈곱만큼도 저속하거나 경박한 표현을 쓰고 있지 않다. 장자의 이 신랄한 비판은 우리가 가끔 접하게 되는 오늘날 한국의 저명인사나 중견 정치인의 독설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그저 그런 수준의 이런 발언들을 위대한 장자의 그것과 비교하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에 가깝기는 하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야비한 독설과 상스럽고 저속, 경박한 언어 표현이 판치고 있다.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언어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일반인들이 그런 독설이나 상스러운 표현을 하는 사람을 우러러본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던 시절에는 달랐다. 비판이나 정론 자체가 불온시 되고 정치적 발언을 하면 상당한 위험을 예상해야 했던 시대에는 비판이나 독설은 그 자체로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설령 그것이 다소 거칠고 정제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다르다. 우리의 정치 현실과 사회 분위기가 최선진국 수준의 자유로움과 관용을 지녔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대통령을 향해 직설적 비판을 해도 적어도 신변상의 위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 일반 국민은 독설가를 용감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상습적 독설가나 독설 전파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은 이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독설은 불필요한 감정적 자극일 뿐이다. 독설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열 받게’ 할 뿐이다. 그리고 상스러운 비난이나 욕설 퍼붓기는 그렇게 하는 사람의 인격이 천박하고 교양이 저열한 수준임을 보여줄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저속하고 상스러운 언어 표현은 발언자의 사고나 감성을 더한층 저속하고 상스럽게 만들어놓는다는 점이다. 

 

언어는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한 수단이라는 것은 명백하고 상식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이 오히려 언어에 의해 강력하게 지배된다는 사실은 별로 인식되어 있지 않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은, 마치 물이 수로를 따라 흐르듯이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다듬어지고 정리된다. 거칠거나 상스러운 표현을 쓰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일단 그런 언어 표현은 거칠거나 상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려는 사람이 동원한 수단이다. 그런데 그런 거칠거나 상스러운 표현을 즐겨 쓰게 되면 이런 표현으로 인해 우리의 사고나 감성 자체가 거칠거나 사나워진다는 것이다. 

 

말이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생각이 말에 의해 절대적으로 지배된다는 이런 주장을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라고 한다. 

 

즐거우니까 웃고 슬프니까 운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지당한 말인데,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역(逆)도 성립한다. 썩 내키지 않더라도 웃다보면 즐겁다는 정서가 생겨나고 울다보면 슬픈 감정이 우러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언어 표현과 정서, 사고와의 관계는 행위와 감정과의 관계와 비슷해 보인다. 

 

결국 조잡하고 경박한 사고나 저속하고 상스러운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언어를 절제하여 사용하고 품격 있게 구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말이라는 것이 단지 느낌과 생각을 나타내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느낌과 생각을 적극 주조한다는 사실은 두렵기까지 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함부로, 거칠게, 경박하게, 상스럽게 말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비판이나 공격, 반박을 할 때에도 이성에 바탕을 두고 조심스럽고 절제된 표현을 선택해야겠다. 이런 노력은 궁극적으로 각 개인을 품위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사회적으로는 진정한 상호 존중과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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