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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자에게 만일 정치를 한다면 무슨 일부터 하겠느냐고 묻자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것’을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되는 것(君君 臣臣 父父 子子)”이라고 풀이했다. 이 점을 “만일 ‘모난 술잔(觚)’이 모가 나지 않다면, 그걸 어찌 모난 술잔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이름이 정말 이름으로 성립하려면 그 이름(名)에 부합하는 실제(實)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약 2천5백년 된 《논어》의 한 대목이다.

 

1960년대 중반에 한국의 시인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우리나라의 분단상황을 극복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응결되어 있는 명시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문학작품이 대체로 그렇듯이, 이 시에서 신동엽이 없어지라고 절규했던 ‘껍데기’가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한 두 마디로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알맹이나 씨앗이 아닌 어떤 것, 허울 뿐인 그 무엇을 상징함은 분명해 보인다. 

 

공자와 신동엽 사이에는 약 2천5백년의 시간적 거리가 있다. 공자가 바로잡으려던 ‘이름과 실제 간의 괴리’와 신동엽 시인이 몰아내야 한다고 외친 ‘껍데기’ 사이에는 차이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이 비판하는 점은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 한마디로, 인간 사회의 온갖 문제나 악은 겉과 속, 외형과 실질, 명분과 실제가 불일치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은 반세기 남짓한 기간에, 동족상잔의 참극까지 겪으면서도 경이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어느 하나도 만만치 않은 양대 과제,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달성했다. 오늘날에는 산업화 다음 단계인 정보화에서 조차 세계 선두 그룹에 들었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얼핏 보면 오늘날 한국 국민은 선진국에 있는 것은 이미 다 갖춰 놓고 사는 것 같다. 


일상용품이나 생활양식은 말할 것도 없다. 기업 조직, 교육 제도, 언론 매체, 문화 공간, 정치 제도와 국가 운영체계 등, 어느 면으로나 선진국에 있거나 선진국 국민이 누리는 건 다 있고 다 누리는 듯 보인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우리가 뿌듯한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고 여긴 그동안의 ‘빛나는 성과’가 ‘빛 좋은 개살구’였음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문제는 발생한다. 어떠한 사회가 과연 선진사회인지, 합당한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구축됐는지는 바로 문제에 대응하고 해법을 마련하는 데서 판가름 난다. 마치 한 개인의 진면목이 역경에 처했을 때 숨김없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나라 각 분야의 역량이나 구조의 내실은 어떨까? 거의 모든 영역에서 다양한 문제가 계속 터져 나오는데, 거기에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명칭이나 외형은 그럴 듯한데, 내실이 없거나 ‘속 빈 강정’인 경우가 흔하다. 

대형 사고나 무슨 ‘게이트’가 발생하면, 이름과 실질 사이에 괴리 정도가 아니라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비치는 수가 적지 않다. 시스템의 구성 부품이나 연결고리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피해나 문제를 충분히 최소화할 수 있었겠다고 생각될 때가 참으로 많지 않은가.

 

우리나라를 진정한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식과 품성, 사회의 시스템과 문화, 이 모든 면에서 ‘명실상부(名實相符)’를 지향해 나아가야 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름과 실상이 일치하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열거해보자. 

-한 개인으로서는 자신의 직업 정신에 더욱 투철해야 한다. 

-각종 시스템은 더욱 공들여 구축하고 원활히 작동하게 해야 한다. 

-모든 기관이나 조직은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지 성찰해봐야 한다. 

-매뉴얼은 실제성을 지니도록 정교하게 작성하고 실행해야 한다. 

-국가 기관이나 특히 고위직 종사자(정치인, 장차관, 판사, 검사 등)는 본연의 책무에 충실한지 늘 성찰해야 하고, 공적인 감독기구(언론, 검찰, 경찰, 감사원, 법원 등)는 이런 감독과 견제가 본령임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모임에서 기발하고 압축적인 구호나 건배사를 보게 된다. 사자성어(四字成語)로 각오를 새롭게 다지거나 조직 목표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럴 때 나는 ‘명실상부!’를 제안하고 싶다. 너무 딱딱하다면 ‘이름값 제대로 하자!’로 바꿔도 좋을 것이다. 글자 수가 약간 많아 보인다면 ‘이름 값을!’ 이라고 줄여도 괜찮겠다. 글자 수나 표현 자체보다는 실질이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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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9-13 17: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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