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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충무공 이순신 종가에서 전해져내려온 장검 한 쌍(보물)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권총. [사진 문화재청, 전쟁기념관]

충무공 이순신 종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장검 한 쌍(보물)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권총. [사진 문화재청, 전쟁기념관]






광화문광장이 다시 열렸다. 광장 면적이 두 배로 넓어졌다. 지난 토요일 현장을 찾았다. 광장의 얼굴인 이순신 장군부터 만났다. 광장 바닥, 동상 좌우로 작은 승전비가 설치됐다. 왼쪽에 23개, 오른쪽에 12개 총 25개다. 왼쪽은 충무공의 23전 23승을, 오른쪽은 충무공이 치른 주요 전투를 가리킨다.


영화 ‘한산’, 소설 『하얼빈』의 물음
시대의 물길 돌려놓은 두 대장부
지금 집권층은 어디로 가고 있나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에 따르면 충무공이 참여한 해전은 총 45회, 40승5무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불멸의 기록이다. 왼쪽 비석에 충무공의 기개를 압축한 어록이 새겨 있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1598년 노량해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1597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후) 등등.

요즘 혼돈의 통치권을 꾸짖는 듯한 말도 눈에 띈다. ‘관직을 뽑는 지위에 있는 동안에는 같은 문중이라 만날 수 없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이 쓴 최초의 이순신 전기인 『이충무공행록』에 관련 대목이 나온다. 이순신은 성격상 아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능력을 알아주는 이가 드물었다. 어릴 적 친구 유성룡이 당시 이조판서 율곡 이이를 찾아가 부탁해 보라고 권유했다. 이순신과 이이는 덕수 이씨 같은 문중이었다. 하지만 충무공은 앞의 말 그대로 처신했다.

충무공은 부당한 인사 압력도 참지 못했다. 훈련원 봉사(정8품) 시절, 그의 상사가 친분 있는 사람을 높은 자리에 임명하려 하자 충무공은 바로 ‘노(No)’라고 답했다. “마땅히 승진해야 할 사람이 (불이익을 받게 돼) 공정하지 않다”고 항변했다.

원칙과 대의에 철두철미했던 충무공의 한 단편이다. 요즘 관객 4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한산’에 재연된 충무공의 밑바탕엔 이 같은 엄격한 자기 및 주변 관리가 깔려 있다. 영화에서 충무공은 전쟁은 ‘나라와 나라’가 아닌 ‘의(義)와 불의’ 의 싸움이란 비현실적인 말을 한다. 김한민 감독의 순진한 유추일 뿐이지만, 민생을 절멸시킨 ‘불의의 전쟁’에 통곡하는 충무공의 면모로 볼 때 마냥 허튼소리만은 아니다.

 실제로 충무공은 『난중일기』에서 “원통하고 분하다” “아프고 답답하다” “괴롭고 어지럽다” 등을 수시로 쏟아낸다. 전황에 어두운 임금과 동료 장수, 사람을 짐승처럼 살상하는 왜군, 전투보다 전공(戰功)에 매달리는 명나라 장수 등 그가 느끼는 슬픔은 깊고도 넓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 명량분수대에서 아이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뉴스1]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 명량분수대에서 아이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뉴스1]


 










소설가 김훈의 밀리언셀러 『칼의 노래』(2001) 곳곳에는 이순신의 비애가 스며 있다. 작가는 특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지도층을 충무공의 입을 빌려 성토한다. “그들은 헛것을 좇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것은 사실의 바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충무공에게 칼은 시대의 고통을 베는 말이었다.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칼이 권세와 이윤을 도모하는 칼이었다면 충무공의 칼은 백성과 도의를 살리는 칼이었다.


김훈의 문제의식은 청년 안중근의 고뇌와 결단을 다룬 신작 『하얼빈』에도 이어진다. 비유컨대 ‘총의 노래’쯤 된다. 똑같은 동양 평화를 외쳐도 이토 히로부미의 총이 일본의 침략을 합리화한 총이었다면 안중근의 총은 한·중·일의 공생을 희구한 총이었다. 안중근이 거사 직후 생명을 끊지 않고 법정에 나선 것도 일제의 야욕을 만방에 알리려는 당당한 선택이었다.


이순신과 안중근, 400년 전과 100년 전의 두 대장부가 묻고 있다. 우리는 현재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김훈 작가는 “지금이 더 위태롭다. 출구가 안 보인다”고 했다. 일촉즉발의 미·중 충돌이 대표적이다. 핵무장한 북한, 소통단절의 일본도 난제 중 난제다. 내부 총질이 점입가경인 여권은 또 어떤가.


 1주일 후면 8·15 77주년이다. 위기의 대통령이 겹겹의 파고를 헤쳐갈 방책을 낼 수 있을까. “배운 자들이 구사하는 지배적 언어는 헛되고 또 헛되었지만”이라는 소설 속 안중근의 말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우리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 (중앙일보 2022. 08.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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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8-10 18: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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