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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 36> 먼저 본분과 본령에 충실해야 한다
  • 기사등록 2022-05-23 21:40:14
  • 기사수정 2022-05-23 21:5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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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추시대 명재상 자산(子産)이 정(鄭)나라의 정치를 맡고 있을 때 자기의 수레로 진수(溱水)와 유수(洧水)를 건너려던 사람들을 건너가게 해주었다. 맹자가 이 일에 대해 말했다. 


“은혜를 베푸는 일이기는 하지만 정치를 제대로 할 줄은 모르는 거야. 농한기인 11월이 되면 일단 (규모가 작은) 통나무 다리를 만들어 주고, 12월이 되면 수레도 건너갈 다리를 만들어 주면, 백성들은 강물 건너는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군자가 정치를 공평히 하기만 한다면 행차할 때 길 가던 사람들을 모두 비켜서게 하는 불편을 끼치는 일을 해도 괜찮을 거야. 어찌 한 사람 한 사람 강물을 다 건너게 해 줄 수가 있겠나? 정치하는 사람이 모든 개개인의 환심이나 사려고 든다면 (그런 일만 하는 데도) 날짜가 모자랄 거야.” 

 

《맹자》 ‘이루장구(離婁章句) 하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소 의외다. 맹자는 흔히 민본주의자라고 일컬어진다. 백성의 어려움이라면 무조건 발 벗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함직한데, 정나라 재상 자산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이다. 자산이 한 일은 물을 건너지 못해 애태우던 여러 백성을 자기 수레로 건너가게 도와 준 것이다. 요즘 같으면 국무총리가 자신의 자가용 차량으로 많은 국민을 강을 건너도록 태워다 준 일에 비유할 수 있겠다. 

 

이게 뭐가 그리 비판받을 일인가? 맹자는 자산이 국민에게 은혜를 베푸는 방법이 글러먹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을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서민들에게 자가용을 태워 건너가게 해 준 행동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한 나라의 재상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 때 이런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식의 시혜는 당초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국 공평함마저 잃게 된다. 기껏해야 눈에 띄는 몇몇 사람만을 도와줄 수 있을 뿐이고, 사정이 훨씬 딱함에도 재상의 자가용 수레를 타는 행운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한마디로 그건 땜질식의 미봉책에 불과하다. 

국가를 다스리는 고위직 정치인이라면 임시변통의 시혜가 아닌 근본 대책에 생각이 미쳐야 된다. 이를테면 사회의 기본 시스템을 검토하고 장기적 안목에서 대책을 세우며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개선,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는 비판이다.

 

맹자는 정치인에게는 이런 거시적 관점과 본질적 통찰력이 꼭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 의아한 행동조차 용인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정치인이 ‘폼을 잡기 위해’ 다소 불편을 끼치는 일(여기서는 자기가 행차할 때 백성들을 길에서 비켜서 있게 하는 ‘권위적인’ 조치)조차 허용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맹자는 영역과 직분에 따라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과 해법이 달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위의 상황에서, 만일 하급 공무원이나 서민 청년이 자신의 나룻배로 사람들에게 물을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왔다면, 맹자는 아마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행동이라고 격찬했을 듯하다.

 

이렇게 보면 본분에 맞게 행동함이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함은 막연히 짐작해보는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본분이나 본령에 충실하지 않은지 하는 잣대는 개인의 처신이나 행동에만 들이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달리 말하면, 개인의 행동은 물론이고 집단의 활동에서도 본분이나 본령이라고 볼 수 있는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 엄연히 있다는 것이다. 본분이나 본령에 충실하고 그렇지 않은 일에는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주문은 시쳇말로 ‘오지랖 넓게 굴지 말라’는 소리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수많은 ‘시민단체들’은 그 규모나 구성, 행태에서 뿐 아니라 추구하는 목적과 정치적 지향성에서도 현란하다고 할 만큼 다양하다. 그런데 이런 시민단체들 중에는 본분이나 본령에 충실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경우가 ‘차고 넘친다’고 해도 될 정도로 흔한 것 같다. 참으로 씁쓸한 결론이다. 이런 부정적 평가가 순전히 필자의 착오에서 나온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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