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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식의 인문학적 시선-17> 실천이야말로 천국의 열쇠다
  • 기사등록 2021-03-22 15:45:42
  • 기사수정 2021-03-22 16: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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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사람이 천국을 방문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천국에 가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천국에는 수없이 많은 방들이 있었는데, 모든 방이 편안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의자에 사람들의 입과 혀, 귀들만이 놓여 있었다. 다른 방에 들어가니 거기에는 무슨 소책자들과 USB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방문객은 의아하여 도대체 천국이 왜 이러냐고, 왜 사람은 보이지도 않느냐고 안내원에게 물었다. 안내원이 대답했다. “여기에 사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여기서 꽤 떨어진 방에 가면 제법 여러 사람이 있어요. 대표적인 분으로는..... 당신은 동양에서 왔으니 공자가 누구신지 잘 알겠죠? 그 분도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또 석가라는 분도 계시고요. 인도에서 오셨죠. 자격 심사할 때 만장일치로 여기에 모셔진 분들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이 방은 최근에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까?”

“예, 바로 맞추셨습니다. 왜 사람이 없는지 궁금하시죠?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천국에서는 정말로 천국에 올 만한 대상을 엄선하여 모셔옵니다. 여기 있는 입과 혀들은 전부 목사들의 입과 혀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살면서 좋은 말씀을 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다만 입과 혀는 그렇게 했는데 행동은 전혀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몸은 안타깝게도 여기에 오지 못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귀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보기만 해도 끔찍하군요.” 

“방문하는 분마다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허허..... 이 귀들은 평생을 교회에 열심히 다닌 신자들의 귀입니다. 정말로 보배로운 말씀을 엄청나게 들었던 거죠. 그래서 그들의 귀는 하나같이 충분히 천국으로 올 수 있을 만큼 훌륭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말을 들었을 뿐 실천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에 몸뚱이는 천국행을 하지 못했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런데 이 책자들은 다 무엇입니까?” 

“아, 이 많은 소책자들 말입니까? 자세히 보면 책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빨간색이고 또 한 가지는 노란색이죠. 노란색 책자는 여러 나라의 대통령과 정치가들의 선거공약집과 취임사이고 빨간색 책자는 각종 재난 매뉴얼입니다.”

 

“왜 이런 책자들이 천국에 올 수 있었죠? 정말 궁금하군요.”

“그런 의문은 한 번 책자들을 펴 보면 금방 풀릴 겁니다. 선거공약집 내용이나 취임사를 읽어 보신 적이 있으세요? 하나 같이 혀를 내두르게 경탄스럽습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일, 세상이 개선될 일은 망라되어 있다고 보면 될 거에요. 특히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취임사나 선거공약집은 천국에서도 단연 금메달감입니다. 여기 천국 입국자격 심사위원들도 그걸 검토하다가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렸다니까요.”

 

“아, 참! 재난 매뉴얼에 대해서 설명하는 걸 깜빡했군요. 정말이지 저는 매뉴얼 책자를 보면서 인간이 참으로 현명하고 위대한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청천벽력 같이 갑작스럽게 닥친 재난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정말 차근차근, 논리정연하게 써 놨더군요. 이곳 심사위원들도 인간의 이런 냉철한 사고와 이성적인 태도에 질투심을 느낄 정도였답니다. 물론 허술한 구석이 전연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죠.”

 

“가만히 보니까 책자들 옆에 USB가 잔뜩 쌓여 있군요. 천국도 디지털 시대에 돌입했나 보죠? 정보가 상당히 많이 입력돼 있을 것 같은데,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아..... 예, 디지털이야말로 말 그대로 유비쿼터스 아닙니까? 그야말로 우주적으로 진행되는 트렌드니까요..... USB는 다양한 정책 아이디어들을 저장한 건데, 몽땅 정치인들 것입니다. 아까 그 선거공약집도 물론 정치인들 것이죠. 짐작하시겠지만, 선거공약이나 정책 아이디어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천국으로 올만 한 내용이 넘쳐납니다. 목사와 신도들 간에 교환된 말씀 뺨칠 정도로 훌륭하죠. 참말로 사람이란 존재는 똑똑해요! 신이 시기심을 느낄 정도로 말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신도 경탄할 정도로 훌륭한 걸 지니고도 그 주인들은 왜 천국 문턱을 넘어오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간단히 대답하죠. 정치인들의 행동이나 실천이 그들의 공약이나 정책 아이디어 자료에 비해 뒤떨어졌던 것입니다. 매뉴얼의 경우는 막상 관련자들이 재난을 당하자 그 내용대로 실천하지 못했고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천국의 입국자격 기준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처럼 경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또 위기상황에 처해서 매뉴얼에 쓰인 대로 눈곱만큼도 차질 없이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그건 사람한테 신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장 기준을 완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흥분하지 마시고 제 말씀을 들어보세요. 여기 천국의 심사위원들도 상당히 관대한 분들입니다. 인정도 많고요.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취임사와 선거공약집을 보고도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고요. 인간은 도덕적 요구나 당위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약속이나 좋은 아이디어를 실천하는 데 매우 약합니다. 의지력이 강하다는 사람조차 실천력이 시원치 않은 게 분명한 사실이죠.”

 

안내원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정호승이란 시인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썼습디다만, 제 생각에는 ‘의지가 약하니까 사람이다.’라고 해도 말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 천국에서는 자기가 접한 좋은 말씀이나, 공적인 약속, 건설적인 아이디어 등의 60퍼센트 이상 실천한 사람에게는 무조건 천국 입국 합격증을 주고 있어요. 언행일치(言行一致)니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니 하지만 일치나 합일이 아니라 3분의 2에도 못 미칠 정도로 합격선이 너그러워요!”

 

천국 방문객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말씀을 듣고 보니 기준이 상당히 관대함을 알겠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정치인의 경우 자격기준에서 사소한 차이로 떨어진 사람들, 이를테면 커트라인에 걸린 정치인은 몇 명이나 되나요? 꽤 많을 것 같은데.....”

 

“아, 뭐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교회 신자의 경우 근소한 차이로 자격에 미달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습니다. 옆에서 봐도 정말 안타깝죠. 그런데 정치인의 경우는 커트라인에 걸리는 일이 거의 없어요. 한 마디로 60퍼센트 기준에서 아득히 떨어진다는 거죠.”

 

안내원은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방문객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최근에 이곳에서도 정치인의 경우에 한해서 기준을 20퍼센트까지 낮춰야 한다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천국에 정치인이 전무하다는 건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니까요. 상당히 현실적인 주장이기는 한데..... 그럴 경우 다른 심사 대상자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기는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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