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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의 북방에 살어리랏다-제3화> 최초 한국 하숙생의 애환
  • 기사등록 2020-08-24 10:23:48
  • 기사수정 2020-08-28 15: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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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 공사

前 서강대 겸임교수

現 국회사무처 (사)유라시아21 부이사장

상트 페테르부르크대 경제학 박사




  ‘흐루시초프 집’에서 2주일을 보내면서 마땅한 거처를 찾고 있었다. 하루는 오가이 회장의 처남인 아포냐 집을 방문했다. 남쪽 외곽에 있었지만 현대식 고층 아파트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 둘과 부부가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포근한 가정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방 3개 중 하나가 비어 있었다.


‘하숙생을 두느냐’고 묻자, 아내 소냐는 ‘하숙이 뭐냐’고 되물었다. 하숙제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포냐 부부는 기꺼이 동의했다. 하숙비는 알아서 달라고 했다. 얼마를 책정할까 고민했다. 러시아인들의 평균 월급이 환율로 환산하니까 100달러 정도였다. ‘50달러면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좋다’고 했다. 러시아내 최초의 하숙생이 된 순간이었다. 


 식사는 기대했던 것에 비해 매우 부실했다. 밥과 국, 그리고 양배추를 듬성듬성 썰어서 담근 김치가 전부였다. 영국에서의 하숙생활이 그리웠다. 1989년 7월 런던에 도착해서 아파트를 구하기 전에 교민 집에서 2개월 남짓 하숙생활을 했다. 한식과 양식을 적절히 배합한 식단은 휼륭했다. 하숙비도 영국의 물가수준에 비하면 적정했다. 물론 요리사 출신인 주인 아저씨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곳 러시아의 하숙생활은 그렇지못했다. 연일 반복되는 동일 식단이 식상했다. 생활비가 없는가 보다. 하숙비 1개월분을 미리 지불했다. 아포냐는 달러를 처음 구경한다면서 만지작거리며 신기해 했다. 여전히 식사수준에는 변화가 없었다. 50달러를 루블화로 바꾸면 가족 모두가 넉넉히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달러를 쓰지않고 신주단지 모시듯 간직하면서 가끔씩 꺼내 만지작거리곤 했다. 먹고싶은 과일조차도 없었다. 강의가 끝나면 길거리 노점상에서 과일을 사서 배낭에 가득 담아 귀가했다. 그러나 며칠을 못 버티고 동이 났다. 하숙생이 아니라 식품 조달꾼이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매일 과일을 사들고 오는 것도 힘들고 짜증났다. 


차라리 자취생활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군대생활을 떠올렸다. 긴긴 겨울밤에 야간 보초를 설 때, 옆 전우와의 대화는 주로 먹는 것이었다. 휴가 가면 꼭 맛 보아야 할 음식목록을 열거하곤 했다. 싱싱한 생선회를 빼놓을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포냐가 자신이 생선회를 요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싱싱한 생선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묻자 ‘걱정말라’고 했다. 며칠후 그는 신바람이 나서 들어왔다. 물고기를 구했다는 것이다.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생선회를 요리했다. 양배추를 썰어서 식초와 버무는 것이 전부였다. 생선무침이었다. 식구들이 식탁앞에 모였다. 


생선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 구역질이 났다. 무슨 생선이냐고 물었다. 잉어였다. 정색을 하면서 부패된 민물고기를 날 것으로 먹으면 큰일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힐끔 쳐다봤다. 서투른 우리말로 대꾸했다. “우리 할아부지도 먹고, 우리 아부지도 먹었어. 일 없었어! 일 없어!” 초등학생인 류바와 올랴는 맛있게 먹었다. 


가족들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누구하나 복통을 앓거나 탈 나는 사람이 없었다. 인간의 신체기능도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2개월간 하숙생활은 이렇게 끝났다. 지금도 씁쓸한 추억이 뇌리속에 남아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방속에 비닐봉지를 항상 넣고 다녔다. 길거리를 가다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으면 무조건 발걸음을 멈췄다. 생존을 위한 생명줄이었다. 줄이 길수록 귀한 물건임을 반증했다. 영하 10도의 추위에 20∼30분씩 줄서있는데 바로 앞사람에서 끝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불평 한마디 없이 흩어졌다. 그날은 ‘운수 좋지않는 날’일 뿐이다.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형 백화점도 텅텅 비었다. 하루종일 손톱 소제나 하다가 퇴근하는 여점원도 있었다. 그들도 국가에서 급여를 받으니까 공무원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전국민이 공무원인 셈이다. 


한번은 생선가게에 냉동 오징어가 출현했다. 한 상자를 샀다. 다음은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옆에서 수군거렸다. ‘마피아’라고...러시아인들은 한 두 마리 사는 것이 고작이다. 되팔기 위해 매점매석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소련에서는 이런 부류를 협잡꾼 또는 투기꾼, 보다 세련된 표현으로는 마피아로 불렀다.


                                                  모스크바의 생선가게 모습                                                                            


일반상점이 파산지경에 이르면서 재래시장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장마당에 해당한다. 시장경제 논리가 작동하는 곳이다. 가격은 정찰제지만 흥정이 가능했다. 끝없이 폭락하는 루블화가 현지인에게는 고통이지만, 외국인에게는 기쁨이었다. 달러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국 유학생들은 강의가 끝나면 미리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 호텔 뷔페로 달려갔다. 


레닌그라드 호텔에 유일무이한 ‘스웨덴식 식탁’이라고 부르는 뷔페식당이 있었다. 음식 종류는 몇가지 안 되었지만 그래도 골라먹을 수 있다는 특권이 있었다. 그저 주는 대로 받고 주는대로 먹어야 하는 배급제 사회에서는 경이로운 제도였다. 물론 이곳은 외국인 투숙객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도 먹을 것이 없는데 웬 강아지는 그렇게 많은지...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황소만한 세퍼트를 기르는 사람도 있었다. 안방에서 개와 함께 지냈다. 한국에서는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고 하자 기겁을 했다. 야만족이라는 것이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가출한 유랑견들이 늘어났다. 


특히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에는 개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행인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애완견 금지령을 내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부르죠아의 잔재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후 주북 러시아 대사관에서는 오보(誤報)라고 정정했다.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데 웬 강아지냐는 북한의 속사정을 차마 얘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1990년대 후반은 남북한·러시아 3국이 모두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러시아는 보수세력의 쿠데타에 이어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게 나라냐’는 국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북한은 전통맹방인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고 소련이 무너지면서 고립무원의 고아국가가 되었다.


 ‘고난의 행군’속에 수백만명이 기아선상에 방치됐다. 한국은 초유의 국가부도인 IMF시대를 감내해야 했다. 푸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2000년 7월 러시아 정상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 


푸틴과 김정일은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자는 의지를 다졌다. 그후 러-북관계는 급속히 회복됐다. 최근에는 미국의 대러·대북 경제제재라는 또다른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사실상 소련 당시의 동맹관계로 회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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