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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의 북방에 살어리랏다> 제2화, 러시아 아파트 생활의 명과 암
  • 기사등록 2020-08-14 16:10:24
  • 기사수정 2020-08-26 17: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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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주러 한국대사관 공사

前 서강대 겸임교수

現 국회사무처 (사)유라시아21 부이사장

 



 

 모스크바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로 이동했다.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는 비행거리다. 기내 분위기는 시골 장터의 완행버스를 방불케 했다. 여승무원은 시골 아낙네 같았고, 어떤 승객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안고 탑승했다. 애완용이 아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공항에 도착했다. 8월말 북방의 수도는 을씨년스러운 늦가을 날씨였다. 고려인협회의 오가이 회장이 마중을 나왔다. 곧바로 아파트로 향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 모스크바 주재 코트라(KOTRA)에 부탁해서 임시 거처를 마련해 놓았다. 네바강 외곽의 샤우메나 거리 12번지였다. 


우리나라의 주공아파트였다. 일명 ‘흐루시초프 집’이다. 1960년대 흐루시초프 집권 때 서민용 소형 아파트를 대단위로 건설했다. 날림공사는 아니지만 초라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건물이 낡고 왜소하면 ‘흐루시초프 집’이라고 비아냥 거린다.


                                             러시아 아에로플로트 항공사의 여자 승무원


 출입구로 들어서자 악취가 진동했다. 반사적으로 뒷걸음 쳤다. 복도에는 전등도 없었다. 전력이 풍부하면 뭐하나? 전구가 없는데. 내 소유가 아니면 방치했다. 정부가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외형과는 달리 아파트 내부는 비교적 양호했다. 다만 침대가 소파 겸용으로, 접으면 소파요 펼치면 침대다. 


누우니까 등짝이 불편했다. 엎치락뒤치락 잠을 설쳐야 했다. 베란다 창 너머로 달빛이 처연하게 비쳤다. 쥐 한 마리가 창가에 쪼그리고 앉아 방안을 응시했다. 쉿! 쉿! 하면서 쫓았지만 미동도 않고 더 또렷하게 나를 노려봤다. 온몸에 소름이 솟구쳤다. 전등을 켜니까 그때서야 어슬렁 어슬렁 사라졌다. 러시아 첫날밤의 신고식은 그렇게 치뤄졌다. 


 2개월후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고려인 아주머니 류드밀라의 소개로 45평형 아파트를 월세 100달러에 임대했다. 크고 깨끗하고 편리했다. 10년 정도 지났지만 새 아파트로 분류됐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커서 썰렁했다. 거실에 탁구대를 설치해 놓고 지인들이 오면 탁구를 쳤다. 


문제는 바퀴벌레였다. 아침에 일어나 부엌에 가면 싱크대 안에 시커멓게 모여 있었다. 인기척이 나면 순식간에 흩어졌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뜨거운 수돗물을 순간적으로 틀었다. 사망률은 50% 정도였다. 하루 일과를 바퀴벌레와의 싸움으로 시작했다. 이것들은 추운 겨울에도 아파트 건물 곳곳을 돌아다녔다.


           한국의 주공 아파트처럼 생긴 주택으로 러시아에서는 '흐루시초프의 집'으로 통한다.

                    


러시아식 아파트는 여러 동을 연결시켜 놓은 구조다. 건물 전체를 공동 방역하지 않으면 바퀴벌레를 박멸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친구삼아 살아야 했다. 1990년 러시아 생활 첫 해만 해도 치안이 좋았다. 새벽까지 시내 맥주집에서 놀다가 귀가하곤 했다. 그러나 1991년부터 경제상황이 점점 악화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으로 외국인들이 밀려왔다. 서방소식을 접한 러시아 국민들은 상대적 빈곤감을 토로했다. 외국인들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필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루불화는 갈수록 폭락하고 달러의 위력은 그만큼 세를 더해 갔다. 100달러 아파트 월세가 1년뒤 루불화로 38달러까지 떨어졌다. 한국 유학생들은 부의 상징이었다. 매월 300달러만 써도 백만장자로 인정받았다. 


 1991년 2월 네바 강변의 겨울은 매서웠다. 햇볕을 구경할 수 없는 어둠의 나날이었다. 백야현상 때문이다. 여름은 정반대다. 대학강의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귀가했다. 따끈한 된장국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아파트문을 열었다. 복도끝 안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혼자 사는 집에 누가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바짝 긴장하면서 안방문을 열었다. 어떤 중년 남성이 침대위에 누워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침착하게 대응했다. “당신 누구야?”하고 소리쳤다. 그는 “주인이다!”고 응수했다. “내가 주인인데 무슨 소리냐. 빨리 나가라! 경찰에 신고하겠다.”  그러나 이 무법자는 ”이 방은 내방이다. 당신이 나가라!“ 라고 핏대를 세웠다. 그는 주민등록증을 보이면서 자신이 소유주라고 주장했다.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아파트를 소개해준 류드밀라 아주머니에게 급히 전화했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내 살고있어서 곧바로 달려왔다. 그 남자를 보자마자 호통을 쳤다. ”이혼했으면 끝이지. 왜 와서 행패를 부려! 당장 나가!“ 그놈은 슬금슬금 밖으로 사라졌다. 마치 첫날밤에 베란다에서 나를 응시했던 쥐처럼...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사연인즉 여주인의 전 남편이었다. 사회주의 집단문화의 관행상 아파트 1개라도 방별로 소유주가 다를 수 있었다. 안방이 그의 소유였지만, 이혼하면서 아내에게 전부 넘겼다. 그러나 주민등록상에는 여전히 그의 소유였다. 이 건달은 돈많은(?) 외국인이 임대해서 산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다. 자신이 갖고 있던 열쇠로 아파트 문을 따고 무단 침입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옐친 정부의 사유화 정책이 발효됐다. 정부 소유의 아파트가 개인에게 넘어갔다. 당시 아파트 공시가격은 공식환율 1달러=0.6루불 기준이었다. 사유화가 시작되던 때는 환율이 1달러=3,000루불이었다. 거의 6,000배나 싸게 거래됐다. 아파트 한 동 전체를 한 사람이 매입하는 경우도 적지않았다. 


이들은 졸지에 신흥자본가로 부상했다. 이로인해 ‘노브이 루스키’(신 러시아인)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모스크바 시내 아파트 임대료는 천정부지로 뛰었다. 35평형 기준으로 월세가 200만원에서 500만원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전망좋은 모스크바 강변의 최고급 아파트인 ‘알르이 파루사’는 월세가 최소 600만원에서 1,000만원 수준이었다. 


주로 삼성·LG 주재원들이 살았다. 물론 본사가 전액 지원했다. 필자도 2007년 모스크바 대사관에 다시 부임했을 때 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행운을 얻었다. 공관원으로는 유일했다. 정부의 지원금으로는 어림 없었지만, 협상을 잘했다. 유학생활을 통해 터득한 생존전략이 주효했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 병합에 따른 서방의 경제제재를 받자 루블화가 평가절하되고, 임대 외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수혜자로 탈바꿈했다. 


아파트 문화는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식 발상이다. 러시아혁명 이후 귀족들의 저택을 몰수해 여러 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공동주택으로 개조했다. 부엌, 목욕탕, 화장실을 같이 사용함으로써 세대간 갈등도 적지않았다. 


소련 당시 새로 지은 주택은 예외없이 모두 아파트였다. 위성국인 북한의 건축물도 전적으로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평양 건물들은 소련으로부터 도입된 조립식 건축기법과 시멘트공법으로 재건됐다. 


이러한 건축공법은 2016년 착공해 2017년에 완공된 려명거리 건축물에도 적용됐다. 70층 아파트의 골조공사를 74일만에 완공하는 속도전을 과시하기도 했다. 서울의 전통가옥도 재건축하면 모두 아파트로 변신하고 있다. 사회주의식 주거문화의 장점도 적지않음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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