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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의 북방에 살어리랏다> 제1화, 북방외교의 기수가 되리라 다짐
  • 기사등록 2020-07-13 15:59:56
  • 기사수정 2020-08-26 17:4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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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주러 한국대사관 공사

前 서강대 겸임교수

現 국회사무처 (사)유라시아21 부이사장


 

   이 글은 러시아 통인 박종수 박사가 외교안보 현장에서 오감으로 체감한 경험을 정리한 것이다. 필자는 서강대와 영국 런던대학교를 거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 냉전의 정점에서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수 십 번 자문자답한 끝에 북방(北方)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북한의 종주국 소련을 잡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의 우직한 도전은 1981년 러시아어 공부에서 시작, 10년 후에는 한•소 수교의 현장에 서 있었다. 그 후 30여 년간 주러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참사관, 공사 등을 역임하면서 한•러 외교현장과 아카데미를 분주히 누볐다. 그렇지만 분단 상황은 아직 극복되지 않았다. 다시 던지는 화두는 원점으로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목표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재출발 한다. 저서로  ‘21세기의 북한과 러시아’ 등 여러 권이 있다. <편집자 주>

 

 

러시아어로 제작된 88서울올림픽 로고



   1988년은 특별한 해였다.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12년 만에 전 인류가 이념의 장벽을 넘어 한자리에 모였다. 진정한 화합의 체전이 분단국 대한민국의 수도에서 개최된 것이다. 감격 그 자체였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참가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우리의 간절한 염원은 외면 받지 않았다. 올림픽 기간 중에 뉴스의 초점은 소련 참가단이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카메라 앵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사소한 동정조차도 대통령의 식탁에 올려졌다. 수 십 년간 반공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우리에게 소련인은 외계인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어가 유창한 소련인 통역원이 유난히 주목을 받았다.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동대문 시장에서 쇼핑할 때 상점 주인은 “어머! 얼굴도 잘 생겼고 우리말도 참 잘 하네요” 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흥정에 익숙치 않는 소련 손님에게 왕창세일로 화답했다.

 

소련 선수단과 관광객들은 기업현장을 견학할 때면 푸짐한 선물을 받곤 희색이 만면했다. 올림픽 선수촌에서 사회주의 우월성을 설파했던 바짐(가명) 교수는 카세트 라디오를 3개나 선물 받았다. 귀국해서 카세트 라디오 1개는 세관을 통과할 때 ‘뇌물’로 주고, 1개는 집에 두고 사용했다. 

 

 놀라운 것은 남은 1개로 아파트를 샀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러시아 가서 그의 아파트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방 2개짜리 아파트가 카세트 라디오 1개 값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소련 말기에 PC 1대 가격이 방 3개짜리 아파트 가격과 맞먹었다.


서울올림픽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소련이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소련에 대한 환상과 동경은 맹목적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미국과 소련을 비교했다. 미국 선수가 물건을 훔치다 붙잡힌 사건이 보도됐다.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 놈 나쁜 놈’이라고 비난했고, 그 이면에는 ‘소련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88서울 올림픽 당시 소련(러시아) 선수단이 잠실 주경기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너나없이 모스크바로 향했다. 사무실에 붉은 광장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없으면 팔불출로 매도당했다. 조야의 관심사는 언제 소련과 외교관계를 맺는가에 집중됐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급기야 1990년 9월 30일 역사적인 한•소수교가 이뤄졌다.

 

필자는 지체 없이 영국 유학생활을 접고 소련으로 달려갔다. 수교 1개월 전 소련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언어 종주국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설렘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련 유학 1호’라는 영광만큼이나 고난도 뒤따랐다. 입학 허가서는 받았지만 그곳에서 뭘 먹고 어디서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고민 끝에 약간의 쌀과 쌈장 1통을 준비했다. 막연한 추측으로 거기도 야채는 있을 테니 쌈장에 찍어먹으면 되겠지 하고 말이다. 모스크바를 다녀온 분들에게 물어 봤지만 유학생들의 현지생활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당시 외국인들은 현지 안내원들의 통제 하에 정해진 호텔과 지역만을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 8월 31일 김포공항에서 모스크바행 아에로플로트를 탔다. 소형 기종이었다. 기내 분위기가 어두컴컴했다. 스튜어디스도 무표정하고 무뚝뚝했다. 시골 아낙네처럼 뚱뚱하고 투박해 보였다. 기내 통로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기체가 움직일 때 마다 이리저리 밀려 다녔다. 

두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함께 만감이 교차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10시간 동안 시베리아 상공을 지나면서 온갖 상념에 젖었다. 10여 년 전 한 여대생에게 ‘북방외교의 기수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녀는 나의 감언이설(?)을 믿고 인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실현가능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열정하나 뿐이었다. 

 

막연한 공상이 신념으로 체화되고, 그 신념이 현실로 내 앞에 다가왔다.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처럼 펼쳐질 비전으로 벌써부터 흥분되기 시작했다. 레닌이 물었다. “무엇을 할래(Что делать?)”, 나는 대답했다. “최초의, 최고의 전문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진짜로’ 북방외교의 기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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