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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규화(蜀葵花)


                                              최치원(崔致遠·857~?)  


쓸쓸하고 황량한 밭 가에

가지가 무겁도록 화려한 꽃 달렸네


봄장마 그치니 가볍게 향기 날고

초여름 바람 타고 그림자 한들대네


수레나 말 탄 귀인 누가 와서 보겠는가

벌이나 나비만이 한갓 서로 엿본다네


태어난 땅 천한 것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 버려 둔 것 원망할 수 있으리오




촉규화 이 시는 최치원(崔致遠·857~?)이 당나라에 머물면서 쓴 시다. 최치원은 이국땅에서 느낀 자신의 처지를 접시꽃에 비유해 쓴 것이라고 한다. 


촉규화(蜀葵花)는 접시꽃의 한자어다. 6월에 피는 접시꽃은 여름의 전령사다. 꽃말은 단순·편안이다. 고택 담장 아래 분홍색 접시꽃이 피어 활짝 웃고 있다. 접시꽃 옆 붉은 장미가 이제는 화려한 봄을 떠나보내고, 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 접시꽃이다. 


접시꽃은 시인 도종환으로부터 국민적인 인기 꽃이 됐다. 그는 결혼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바치는 절절한 사부가를 모아 시집 '접시꽃 당신'을 펴냈다. 


1986년 11월에 출간된 이 시집은 당시 15만 부 이상이 팔려나가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 번 써 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앞 날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해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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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6-23 08:4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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