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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2020년 올해는 대한민국의 군대가 일본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역사적인 독립전쟁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했던 우리 독립군의 실상을 잘못 알고 있다.


독립군이라는 게 고작 삼삼오오 모인 소규모 게릴라 수준이거나,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무기도 식량도 없이 헐벗고 굶주렸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한다. 그들은 오로지 조국독립에 대한 열망과 애국심만으로 북간도의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냈을 것이라 믿으며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우리 독립군이 기관총과 대포로 중무장한 일본 정규군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크게 무찌른 것은 가진 것 없는 민병대가 이뤄낸 눈물겨운 기적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역사가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에 대해 오랫동안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만주 무장 독립운동에 대한 일반의 오해


그러나 그런 기적이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 화승총을 가진 산포수 출신 의병 무리들이 일본 군대와 맞붙어 싸워 이겼다고? 홍범도 장군이 총을 잘 쐈기 때문이라고? 뛰어난 명사수인지라 한 두 명을 먼저 맞출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대규모 정규 군대였다. 자기편이 공격을 받아 쓰러지면 나머지 일본군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던,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일본군의 대응을 상상해 보라. 1894년 동학 농민혁명 당시 동학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전멸 당한 것은 그들에게 신형 무기가 있었지만 동학군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독립군이 매복을 하고 봉오동으로 들어온 일본군을 포위한 것이 주효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에게 무기가 없었다면 매복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현대전의 핵심은 무기다. 


상대에 필적할 무기와 병력도 없이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봉오동전투'는 무기와 무기가 격돌한 현대전이었다. 우리가 일본군에 이겼다는 것은 우리 독립군도 무장력을 제대로 갖춘 군대였다는 뜻이다.

 

전쟁을 준비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완성할 수 없는 일이다. 군사를 모으고, 매일 정신무장과 체력을 단련하고, 무기를 갖추고, 총포사용 훈련을 반복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모든 군대는 언제일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쉬지 않고 실전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언젠가 벌어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봉오동·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우리 독립군도 그랬다. 그들은 급조된 민병대나 게릴라가 아니라 임시정부와 함께 한 대한민국의 정규 군대였다.

 

    만주 독립군은 급조된 민병대 수준을 넘어 

    병참, 군수체계 갖춘 정규군대


왜 우리는 지금까지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의 승리를 마치 신화처럼 이해하고 있는가? 어떻게 그런 역사해석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분단과 정쟁으로 당시 독립군들의 삶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암기 위주의 역사교육이 만주지역 독립전쟁의 승리를 역사가 아닌 신화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합리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지만 일본군 사망자 숫자를 외우며 자랑스런 승리라고 스스로를 자위해 왔다. 그러나 이런 피상적 이해만으로는 그날의 승리가 세대를 뛰어넘는 민족적 자부심이 될 수는 없다. 숫자나 기억하는 역사공부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도, 선조들의 삶에 응답하는 용기를 배우게 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만주 봉오동은 장기간에 걸쳐 독립군을 양성한 본격적인 항일 무장독립군 기지였다. 봉오동을 신한촌으로 건설한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1885.11~1945.7, 사진) 은 조선 사람들을 마적단(馬賊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912년 봉오동에 자위부대를 창설했고, 그 100여 명의 사병을 모체로 전국에서 모여든 애국청년들을 정예 무장독립군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독립군이 수백 명으로 늘어나자 1915년 봉오동 산중턱을 개간해 연병장을 만들고, 벌목한 나무로 대형 막사 3동을 짓고, 본부 둘레에 토성을 쌓아 무장독립군 기지를 완성해 본격적인 독립군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준비 중에 1919년 3.1운동이 전 국민을 일깨웠다.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립되었고 최운산 장군은 그동안 봉오동을 지켰던 사병부대 ‘도독부’를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로 재창설했다. 그리고 다음해 ‘대한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간도의 독립군들이 하나로 뭉쳐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출범시켰다. 


      봉오동은 항일 무장독립군 양성 기지, 

      최운산 장군이 대한군무도독부로 키워 


1920년 그들이 작성한 독립군부대 통합문서에 '대한민국 2년 5월 19'일이라는 날짜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봉오동의 독립군은 대한민국의 군인을 자임한 것이다. ‘대한북로독군부’는 3개 연대 예하에 각 대대와 중대로, 그리고 후방부대와 보급부대. 의무부대까지 편제했던 대군단이었다.

 

수천의 독립군이 함께 한 대규모 전쟁을 몇몇 게릴라전으로 축소해 버린 지난 역사로 인해 무장 독립전쟁의 장대한 서사를 배우지 못한 우리는, 만주라는 역사적·시대적 공간을 단순한 물리적 공간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그날의 승리를 민족적 자부심과 일상의 독립정신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그저 일본군에게 이겼다니 기뻐했고 또 쉽게 잊어버렸다.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까지 만주의 독립군들이 어떻게 전쟁을 준비하고 조국의 독립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갔는지, 수 천 명의 독립군들이 하나가 되어 목숨을 걸었던 그날의 언어는 무엇이었는지, 간절했던 그들의 꿈과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함께 상상하지 못했다. 승전의 역사는 축소되고 숫자화 되어 기억의 창고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이제 역사의 이름으로 그날의 전투현장을 불러내고 복원해야 한다. 100년 전 역사 속으로 들어가 봉오동 산위 참호에 매복한 채 일본군의 진입을 기다렸던 그 순간의 긴장을 우리도 함께 느끼고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야 그날의 역사가, 시대가 당신들에게 요구했던 그 열정이, 후세대인 우리에게 말을 걸어와 당신들의 삶을 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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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6-15 17: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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